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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월요일이면 늘 지난밤까지 동료들의 귓가에 도달한 온갖 비어(蜚語)와 유언(流言)들이 사무실 바닥에서 생선처럼 펄떡거린다. 각각이 물어본 유언들과 모두가 공통으로 확인한 비어들은 그렇게 펄떡거리다 책상 서랍이나 책꽂이, 서류 파일 사이로 슬쩍 스며든다. 그것들은 은밀하게 숨은 채 다시 호명되기를 호시탐탐 기다리다 하루 이틀 사이에 몇 개의 새로운 사실이 보태지면 다시 사람들의 대화 속으로 소환될 것이다. 소문 속에서 파렴치한 정적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적의 명멸에 따라 우군의 표정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희한한 것은, 우리 쪽 사람들은 패배를 말하면서 불안해했고, 승리를 말하면서는 더욱 불안해했다. 침묵과 기다림이 길어지자, 패배든 승리든 빨리 이 숨 막히는 카드를 오픈하고 싶은 마음이 불..

오전에 잠깐 빗방울 떨어졌다. 빗방울은 눈송이로 바뀌어 풀풀 날리다 이내 그쳤다. 바람은 오늘도 싱싱 불었고 기온도 어제처럼 낮아 반소매 차림으로 테라스에 나갔을 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서늘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와 피폐한 민생, 시대가 강제한 집단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서늘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변석개하는 날씨나 봄날 같지 않은 날씨도 모두 시절의 상징 같다. 그러나 흐린 하늘, 시나브로 엷어지는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해를 보며 생각했다. 더는 현실에 얽매여 갈팡질팡하거나 현실을 등진 채 몽매한 우민(愚民)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러자 괜스레 마음이 넉넉해졌다.가끔 습관처럼 “흐르는 물처럼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사실 나는 흐르는 물처럼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

오전에 마트에 들러 순대와 달걀, 곰탕 팩과 콩나물, 숙주와 순두부, 두부와 칼국수면, 아이스크림과 시금치 등을 샀다. 오이와 풋고추, 깻잎은 너무 비싸 단골 채소가게에서 사기로 하고 그냥 왔다. 좀 덜 싱싱해도 반값에 살 수 있어 채소는 단골 채소가게를 주로 이용한다. 오래 보관하지 않고 빨리 먹으면 일반 마트의 채소와 다를 게 없다. 다만 원산지를 표시하지 않고, 현금으로만 계산해야 하는 건 개선해야 할 점이다. 그런 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가격이 싸긴 하지만. 점심에는 장 봐온 면으로 칼국수를 끓였다. 생면이라서 끓는 육수에 칼국수 면을 직접 넣어 끓였는데, 물 조절을 못한 건지 죽이 되었다. 분명 계량컵으로 정확하게 넣었는데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름 면 요리(냉면, 국수)..

잔인한 봄이다. T.S.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달 4월이 코앞이다. 4월에는 뭔가 기쁜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아니 있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되뇌는 하루하루다. 어제는 잠깐 빗방울 떨어졌고 오늘은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기온도 5~6도나 뚝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더니 한겨울처럼 썰렁했다. 22도에 맞춰진 보일러가 돌지 않아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주방에 가서 우유를 컵에 따르며, ‘세상이 거지 같다 보니 날씨도 거지 같군’ 하고 생각했다가 최근 들어 자꾸만 마음이 뾰족해지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러나 놀랐다고 뾰족해진 마음이 이내 부드러워지진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세상이 달라지기 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병이기 때문이다. 정의가 죽고 염치도 죽은 세상에서 마음의..

춘래불사춘, 올봄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적합한 말이 있을까. 기왕에 봄은 왔지만, 봄이 오는 길에 우울도 함께 왔는지 나의 봄은 온통 우울하다. 내 안도 바깥도 온통 우울한데, 혹시 내 우울과 당신의 우울이 만날까 두렵다. 늦은 밤, 카페 ‘산’ 대표인 후배 성식이 전화해서는 “형, 우린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아니에요?” 하고 묻고는 뭔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놨는데 졸려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생각나진 않는다. 다만 “조만간 밥 먹어요. 제가 살게요”라는 말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할 말을 마친 성식은 “형, 이제 혁재 바꿔줄게요” 하며 혁재에게 전화를 넘겼다. 그는 약간 취한 목소리였고, 로미 씨도 함께였다.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더니 “괜찮아요. 아직은” 했는데, '아직은'이라니? 사실 그건 ..

서너 달의 대립과 갈등, 욕설과 저주, 분노와 슬픔이 난무하는 현실이 나의 일상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내 심약한 영혼은 구겨진 휴지처럼 엉망진창이 되었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사람을 만나도 반갑지가 않다. 한동안 물러갔던 불면이 다시 찾아왔다. 조지 오웰의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소설 『동물농장』속의 돼지 나폴레옹이 현실의 '악마들'과 자꾸 겹쳐 보였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 ‘악마들’에 의해 시작된 짐승의 시간이 시나브로 우리 삶의 소중한 모든 걸 잠식하고 있을 때, 강산조차 울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붕괴하고 공직자는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는 현실 속에서 실화(失火)에 의한 산불은 우리 산천을 집어삼키고 있다. 마치 악마가 내뿜는 지옥불처럼 수십 명..

오늘 점심에는 전 비서실장 박(朴)과 함께 보운 형이 소개한 십정동 게장 전문 식당을 찾아가 게장정식을 먹었다. 원래는 나, 박 실장, 보운 형, 유(柳) 정책기획 조정관 등 4명이 먹을 예정이었는데, 시의회에 참석한 유 조정관은 의회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처음 방문했던 탓에 잠깐 방향감각을 잃었다. 45층 마천루가 식당 앞쪽으로 즐비했다. 십정동에 방문할 일이 없다 보니 처음 만난 달라진 마을 풍경이 무척 생소했다. 오늘 방문한 식당 이름은 ‘돈타래 게장정식’이고, 게장정식 가격은 1인당 15,000원이었다. 가격만 봤을 때는 그리 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식탁에 깔리는 반찬들을 보고 나니 비싸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게장정식을 주문했더니..

기다리는 소식은 더뎌 답답하지만,봄도 꽃을 피우기 전 자주 고요하다.그 의도된 고요 속에서 뿌리들은끊임없이 물을 끌어올리고,잎과 가지들은 수없이 흔들리며 햇살을 품는다.능청맞은 침묵이 지배하는 봄날 오후,절망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이 봄을 부디 희망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더욱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는다.저녁에는 수홍 형의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백운으로 넘어가 부평구에서 술 마셨다. 오라는 식당(연탄불고기집)으로 갔더니 수홍 형 친구 화규 형과 후배 창호가 먼저 와 있었고, 나중에는 김 목사도 참석했다. 얼마 전에 취직한 화규 형이 한턱내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술이 들어가자 '왼손이 하는 일을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는' 수홍 형과 후배 창호가 말다툼을 벌였다. 부평의 규모 있는 축..

탄핵 재판이 시작된 지 벌써 삼 개월이 지나고 있다. 처음에는 며칠 내로 윤곽이 드러나리라 믿었다. 정의는 조금 더디더라도 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벌써 꽃망울이 맺히는 이즈음에도 헌법재판소는 너무 조용하다. ‘그곳’이 너무 조용하니 세상은 시끄럽다. 귀가 아프다. 나는 저 침묵이 낯설지 않다. 수상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수없이 속아왔고, 수없이 꺾여왔다. 하지만 조용하다는 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런 믿음조차 없다면 나는 이 봄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볕보다는 자꾸만 그림자를 향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힘겹게 견딜 수 있는 것은 꽃샘에도 불구하고 봄은 어김없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게 ..

민예총 총회를 다녀왔다. 30년 된 조직치고는 무척 소박한 규모의 총회였다. 대체로 토론보다는 보고와 박수로 안건들을 통과시켰다. 뒤풀이를 위해서 빨리 끝내려는 집행부와 참석자들의 생각이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어떤 때는 요식 절차를 생략하고 차라리 뒤풀이에서 회포를 풀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눈 게 더욱 생산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리고 오늘의 ‘빨리빨리’는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함과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추인해야 하는 불편함, 봐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숫자와 통계들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시각장애인 손 시인을 데리고 뒤풀이 장소인 ‘갈매기’로 가다가 후배 종찬의 전시를 구경하러 왔던 보운 형의 전화를 받았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