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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 나희덕 시인이 최근 출간한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창비, 2023)를 소개합니다. ‘시론집’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독자의 관심과 생각의 지형에 따라서 이 책은 시 이야기를 펼쳐놓은 시론(詩論)이기도 하고, 세상과 사물에 관한 ‘나희덕의 생각’을 담은 시론(時論)이기도 하며, 시를 매개로 시인들이 만든 세계의 비밀을 밝혀 보려 시도한 시론(試論)이기도 할 겁니다. 무엇보다 시인이 쓴 비평적 에세이들이라서 시에 관심이 많은 분은 물론이고 시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재미있고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정갈하고 차분한 언어로 풀어놓은 나희덕 시인의 시와 시인들, 자신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읽는 즐거움은 물론 감동과 깨달음의 즐거움을 아울러 얻게 되실 거라 믿습니다. ■■ 이를테면, 나의 기..
런던에 사는 노부부 톰(지리학자)과 제리(심리 상담사)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그로 인한 상처로 힘들어하는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 퇴직을 앞두고 삶의 기쁨을 찾지 못하는 톰의 친구 켄 등 톰과 제리 부부는 주위의 가족과 친구들의 외로움과 슬픔, 기쁨과 행복에 공감하며 그들의 벗이 되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조이가 여자 친구 케이티를 소개하는 자리에 갑자기 메리가 찾아오고, 그녀는 그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조카뻘인 조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어왔던 메리는 혹시 케이트로 인해 자신이 제리 부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 같은 불안감에 사사건건 케이티의 말꼬리를 잡고 급기야는 그녀를 험담하기에 이른다. 그런 메리의 ..
어제에 이어 오늘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며 울고 웃었다. 며칠 전에 쓴 글에서도 밝혔듯이 이 드라마는 현실 고발 드라마가 절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객관적인 태도로 접근하려 한 노력이 많이 읽히었지만) 시선, 다시 말해 다소 주관적인 애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점에서 난 이 드라마를 판타지물이라고 생각한다. 판타지물은 분명 양면성을 갖는다. 판타지는 현실의 그악스러운 실상을 외면하게 하는 당의정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잃어버린 꿈을 회복, 환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국 낭만주의 시들처럼 이상과 동경의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상상적 대안을 만들어내는 기능은 희망이 고갈된 닫힌 사회 안에서는 충분한 의미가 ..
혹시 빈집에 들어설 때마다 지레 겁먹은 내가 괜스레 소리치고 어둠을 향해 대화를 하듯 혼자 큰소리로 중얼거릴 때, 실제로 그 어둠 속에서 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니니? 말 붙일 기회를 엿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냐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나를 기쁘게 해 줄 몇 개의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책상 아래이거나 식탁 의자에 앉아서, 소파에 기대거나 냉장고 옆에 숨어서, 혹은 열린 방문 뒤에서 조마조마하며 나를 기다렸던 건 아닌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지레 겁먹고 어둠 너머로, 아니 어둠을 향해, 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냅다 소리를 지른 건 아닌지. 한쪽의 설렘이 한쪽의 공포로 바뀌는 순간이었을 거야.(새벽 3:21) 김희정 시인의 시집 『골령골』(어린작가, 2022)은 읽..
엄마의 삶과 죽음에서 비롯한 상실과 황망함, 낯설어진 익숙함 혹은 익숙해진 낯섦, 말하고 싶으나 말할 수 없는 마음, 말할 수 없으나 말해야 하는 마음, 엄마의 부재가 불러온 일상의 변화 등에(을) 주목하며(해석하며), 어쩌면 무연(無緣)해 보이는 '당신'까지도 관계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고, 끝내는 온 우주에 마음의 파장을 보내고 있는, 엄마에 관한 이보다 가슴 먹먹해지는 정치(精緻)한 ‘보고서’를 본 적이 없다. 엄마로 시작해서 엄마로 끝나는 두툼한 이 시집을 읽어가면서, 나도 시인의 부름에, 그녀와 엄마의 교감이 발생시킨 파장에 몸이 떨려, 자꾸만 엄마가 생각나고, 울 엄마가 보고 싶어 자주 시집을 덮곤 했다. 날 닮은 여름 얼굴에 주름 서너 개 그어놓은 오후...... 6월의 길 잃은 바람이 내 몸..
■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 같은 날, 스산해진 마음을 다독거려 줄 정겹고 따듯한 시들을 소개합니다. 제목부터 제 마음에 쏙 드는 문동만 시인의 시집 『설운 일 덜 생각하고』(아시아, 2022년)입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시인의 삶과 그의 시가 정확하게 부합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재승덕(才勝德)한 시인 문사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요. 하지만 제가 만난 시인 중 문동만 시인은 꾸려가는 삶과 그것을 그려낸 시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믿음직스럽게 맞아떨어지던지, 그를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살아가면서 서러운 일 서너 번쯤 겪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짓궂은 표정으로 작정하고 달려드는 슬픔을 피할 재간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슬픔은 어쩌면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 두 권의 시집을 받았습니다. 시대와 현실을 대하는 내면의 결기가 예사롭지 않음에 불구하고 평소에는 늘 사람 좋은 남도 사람 특유의 푸근하고 소박한 미소가 아름다운, 목포 박관서 시인의 『광주의 푸가』(삶창시선 67, 2022)와 늘 바라볼 때마다 안쓰럽게 흔들리는 수선화처럼 자주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곤 하는 이설야 시인의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창비, 2022)가 바로 그 시집들입니다. 박 시인의 시들은 ‘광주의 푸가’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빛이자 여전히 빚(채무)이기도 한 광주에 헌정하는 시편입니다. 이 시들을 통해 시인은 결코 박제될 수 없는 역사 속 광주를 자신의 개인적인 삶(자신의 주변과 허다한 인간관계를 포함한) 속으로 끌어와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면화하여 광주의 의미..
인물들이 하나의 호흡을 형성하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연결한 영화. 미영 : 첫 번째 에피소드. 치매에 걸린 엄마와 소설가인 주인공이 다방에서 대화하는 내용. 카메라는 엄마 미영의 젊었을 때 모습을 보여주다가 미영이 자신의 아들 창석을 알아보는 순간, 나이 든 현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석의 아버지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 미영은 창석에게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말을 한다. 창석은 자리를 바꿔 엄마 옆에 앉고 엄마 미영은 창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유진 : 두 번째 에피소드. 소설 계약 건으로 출판사 여직원 유진을 만난 창석은 그녀와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소설에 관한 이야기, 인도네시아 애인에 관한 이야기, 임신했다가 아이를..
일본 영화 와 대만 영화 을 보았다. 두 영화의 결은 다소 달랐지만 모두 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는 게이를 소재로 한 영화였는데 사회 통념상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토록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일본의 문화 풍토가 부러웠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정이 도를 넘은 우리 풍토에서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소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내용은 다소 신파적이었고 게이인 아버지와 어린 시절 버림받은 딸과의 갈등이 결국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해소된다는 전개 또한 기시감이 있는 영화였지만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한 감독이나 감독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고 그 작품에 공감해준 관객이나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스펙터클한 대작은 드물지만 소소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려내는 데는 일본 ..
사과가 어울리는 계절, 사과 향 가득한 시집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도 선배님의 준열한 시 정신에 존경심을 갖고 있사과가 어울리는 계절, 사과 향 가득한 시집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도 선배님의 준열한 시 정신에 존경심을 갖고 있기도 했고, 사람의 향기는 물론 변하는 계절의 향기조차 맡기 어려운 요즘 같은 현실에서 잘 익은 사과처럼 향기(즐겁고 밝고 환하기만 하지 않은, 다양한) 나는 선배님의 시를 읽은 것은 크나큰 행복이었습니다. 어린 열매를 탐스러운 과실(果實)로 만드는 것은 시간의 힘이자 그 시간 속에서 만나는 빛과 물과 공기와 바람 등 자연과 열매가 살뜰하게 교감(또 때로는 부딪침)을 나눈 결과일 겁니다. 열매는 평등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교감하면서도 홀로 도저한 고독 속에 들어 속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