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잔인한 봄날의 일기④ (3-30-일, 눈비 내린 후 갬) 본문
오전에 잠깐 빗방울 떨어졌다. 빗방울은 눈송이로 바뀌어 풀풀 날리다 이내 그쳤다. 바람은 오늘도 싱싱 불었고 기온도 어제처럼 낮아 반소매 차림으로 테라스에 나갔을 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서늘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와 피폐한 민생, 시대가 강제한 집단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서늘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변석개하는 날씨나 봄날 같지 않은 날씨도 모두 시절의 상징 같다. 그러나 흐린 하늘, 시나브로 엷어지는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해를 보며 생각했다. 더는 현실에 얽매여 갈팡질팡하거나 현실을 등진 채 몽매한 우민(愚民)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러자 괜스레 마음이 넉넉해졌다.
가끔 습관처럼 “흐르는 물처럼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사실 나는 흐르는 물처럼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인욕(人慾)의 흐름대로 사는 게 물처럼 사는 것일까? 화나면 욕하고 기쁘면 웃고 슬프면 눈물짓는 그런 삶이 물처럼 사는 것일까? 본능대로 사는 게 물처럼 사는 것이라면 탐욕도 저주도 물처럼 사는 삶이 된다.
하지만 그건 아닐 거다. 막힘없이 그러나 순리대로 사는 일과 탐욕의 화신으로 사는 일은 전혀 다를 테니까. 나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느낌으로 알뿐. 가끔은 논리보다 느낌이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가 이 세상과 모든 관계 속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흐르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어쩌면 이 세상 속 모든 관계 속에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나를 지워가는 일과 다름없을 것이다.
아직은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이 넌덜머리 나는 추악한 세상에도 천진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살고, 그들이 가꾸는 일상의 화단에는 소박한 꿈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테니, 이제는 내 아이와 그들을 키우는 모든 모성과 그 모성을 보호하려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익숙한 절망보다는 낯설더라도 희망을 말해야겠다.
일요일 밤의 어둠은 무척 진지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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