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잔인한 봄날의 일기② (3-28-금, 맑음) 본문

잔인한 봄이다. T.S.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달 4월이 코앞이다. 4월에는 뭔가 기쁜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아니 있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되뇌는 하루하루다. 어제는 잠깐 빗방울 떨어졌고 오늘은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기온도 5~6도나 뚝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더니 한겨울처럼 썰렁했다. 22도에 맞춰진 보일러가 돌지 않아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주방에 가서 우유를 컵에 따르며, ‘세상이 거지 같다 보니 날씨도 거지 같군’ 하고 생각했다가 최근 들어 자꾸만 마음이 뾰족해지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러나 놀랐다고 뾰족해진 마음이 이내 부드러워지진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세상이 달라지기 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병이기 때문이다. 정의가 죽고 염치도 죽은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는 사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추슬러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이유는, 나는 이미 지금보다 더욱 큰 좌절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육사의 시 ‘절정’의 시구절처럼 ‘서릿발 칼날 진 곳’,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극한 상황에 내던져진 채 구겨진 휴지처럼 견뎌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그 진창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따름일 정도로 혹독했던 시간, 그 시간 안에서 나는 상처 입은 짐승이었다. 다행히 그 질곡 속에서도 하나님과 엄마가 내 곁에 있었고, 친구와 형제들이 힘을 보태주었으며, 가장 훌륭한 의사였던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그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혹독한 봄을 보내고 있지만, 이 미증유의 잔인한 시간은 분명 조만간 끝이 날 거라고 믿는다. 무척 더디기는 했지만, 시간은 희한하게도 바르고 신실한 사람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곤 했으니까. 내가 겪은 시간은 냉정한 듯 은밀하게 모든 일을 바르게 돌아가도록 만들어 왔다. 내 바람은 늘 조급했고, 시간은 짐짓 느긋하기만 했으므로 나는 자주 시간을 탓하며 시간을 향해 종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 진실을 드러나게 해주며, 거짓 선지자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좌절을 맛보게 하는 건 결국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욱 나는 지금의 이 질곡의 끝을 낙관한다. 다만 더딘 정의의 실현과 냉혹한 응징이 지체되는 걸 못 참는 건 오로지 조급한 나의 성정 때문인데, 나는 저 ‘악의 여리고 성’을 몰아내려는 나의 이 조급한 공격성을 굳이 버리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잔인했던 만큼, 앞으로 펼쳐질 시간은 더욱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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