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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이상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청구인의 나머지 주장에 대하여 더 나아가 살피지 않더라도, 피청구인의 이 사건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써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에 해당한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 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게 된 부정적 영향과 파급 효과가 중대하므로, 국민으로부터 직접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인정된다. (……) 그러므로 피청구인(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 멍청이 통(統)인 윤은 마침내 파면되었다. 12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거리에 모여 민주주의 회복과 윤의 퇴진을 외쳐왔던 시민들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헌재의..

내일 오전 11시, 윤의 탄핵 재판이 열린다. 시민의 행복과 나라의 운명이 달린 이번 재판에서 윤은 분명 파면되리라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헌재의 ‘허튼짓’이 불안해서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다. 민주주의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인민의 끊임없는 투쟁과 노력, 고민과 성찰 속에서 늘 새롭게 완성되는 것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하루하루다. 최근까지도 만나고 부딪치는 모든 상황과 시간이 때로는 버겁고 또 때로는 벅찼던 게 사실이다. 정신적 트라우마와 불면으로 지새워야 했던 120여 일이 넘는 밤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오랜 믿음과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 사수와 독재자 타도를 외친 수많은 인민의 함성..

날은 아침부터 흐렸다. 휴대전화 AI 빅스비를 통해 날씨를 물었더니 오후 4시쯤에 비가 온다고 예보했다. 아침부터 살짝 설렜다. 최근에 뜬금없이 몇 차례 눈발을 날렸으나 비다운 비는 오지 않았다. 비번이라서 집에서 쉬거나 오후에 출근할 생각이었다. 아침 운동 끝내고 쉬고 있을 때, 이름도 귀여운 비서실 모나미 비서가 전화했다. 4.16 세월호 참사 일반인 희생자 추모제에서 낭독할 감(監)의 추모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아, 벌써 1년이 지나고 다시 4월이 왔구나’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세월이 빠르기도 빠른 거지만, 올해로 11주기 되는 참사와 관련해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 있는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아니 사과는커녕 유족과 희생자들의 죽음을..

4월이 시작되고 봄은 다시 기운을 차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 자운 누나가 준 앞치마 2개를 세탁기에 넣고 우유를 데워 마시며 컴퓨터를 켰다. 여전히 세상은 어수선했고 쓸모없는 말들은 나쁜 먼지처럼 세상에 가득했다. 그리고 갑자기 속보를 알리는 팝업이 떴다. 여당의 유력 정치인이 비서와의 추문으로 결국 자살했다는 소식과, 별다른 이유 없이 오래 침묵해 온 헌재가 이번 주 금요일, 윤의 탄핵을 인용할 거라는 소식이었다. 물론 ‘탄핵 인용’은 내 소망이 반영된 표현이지만, 헌재 재판관들이 상식이 있다면 윤의 탄핵 인용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탄핵과 별개로 내란 범죄와 관련한 형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윤은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추잡한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사사로이 군을 이용하여 국회와..

월요일이면 늘 지난밤까지 동료들의 귓가에 도달한 온갖 비어(蜚語)와 유언(流言)들이 사무실 바닥에서 생선처럼 펄떡거린다. 각각이 물어본 유언들과 모두가 공통으로 확인한 비어들은 그렇게 펄떡거리다 책상 서랍이나 책꽂이, 서류 파일 사이로 슬쩍 스며든다. 그것들은 은밀하게 숨은 채 다시 호명되기를 호시탐탐 기다리다 하루 이틀 사이에 몇 개의 새로운 사실이 보태지면 다시 사람들의 대화 속으로 소환될 것이다. 소문 속에서 파렴치한 정적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적의 명멸에 따라 우군의 표정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희한한 것은, 우리 쪽 사람들은 패배를 말하면서 불안해했고, 승리를 말하면서는 더욱 불안해했다. 침묵과 기다림이 길어지자, 패배든 승리든 빨리 이 숨 막히는 카드를 오픈하고 싶은 마음이 불..

오전에 잠깐 빗방울 떨어졌다. 빗방울은 눈송이로 바뀌어 풀풀 날리다 이내 그쳤다. 바람은 오늘도 싱싱 불었고 기온도 어제처럼 낮아 반소매 차림으로 테라스에 나갔을 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서늘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와 피폐한 민생, 시대가 강제한 집단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서늘함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변석개하는 날씨나 봄날 같지 않은 날씨도 모두 시절의 상징 같다. 그러나 흐린 하늘, 시나브로 엷어지는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해를 보며 생각했다. 더는 현실에 얽매여 갈팡질팡하거나 현실을 등진 채 몽매한 우민(愚民)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러자 괜스레 마음이 넉넉해졌다.가끔 습관처럼 “흐르는 물처럼 살 거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사실 나는 흐르는 물처럼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

오전에 마트에 들러 순대와 달걀, 곰탕 팩과 콩나물, 숙주와 순두부, 두부와 칼국수면, 아이스크림과 시금치 등을 샀다. 오이와 풋고추, 깻잎은 너무 비싸 단골 채소가게에서 사기로 하고 그냥 왔다. 좀 덜 싱싱해도 반값에 살 수 있어 채소는 단골 채소가게를 주로 이용한다. 오래 보관하지 않고 빨리 먹으면 일반 마트의 채소와 다를 게 없다. 다만 원산지를 표시하지 않고, 현금으로만 계산해야 하는 건 개선해야 할 점이다. 그런 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가격이 싸긴 하지만. 점심에는 장 봐온 면으로 칼국수를 끓였다. 생면이라서 끓는 육수에 칼국수 면을 직접 넣어 끓였는데, 물 조절을 못한 건지 죽이 되었다. 분명 계량컵으로 정확하게 넣었는데 왜 그렇게 된 건지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름 면 요리(냉면, 국수)..

잔인한 봄이다. T.S.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달 4월이 코앞이다. 4월에는 뭔가 기쁜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아니 있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되뇌는 하루하루다. 어제는 잠깐 빗방울 떨어졌고 오늘은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기온도 5~6도나 뚝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더니 한겨울처럼 썰렁했다. 22도에 맞춰진 보일러가 돌지 않아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주방에 가서 우유를 컵에 따르며, ‘세상이 거지 같다 보니 날씨도 거지 같군’ 하고 생각했다가 최근 들어 자꾸만 마음이 뾰족해지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러나 놀랐다고 뾰족해진 마음이 이내 부드러워지진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세상이 달라지기 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병이기 때문이다. 정의가 죽고 염치도 죽은 세상에서 마음의..

춘래불사춘, 올봄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적합한 말이 있을까. 기왕에 봄은 왔지만, 봄이 오는 길에 우울도 함께 왔는지 나의 봄은 온통 우울하다. 내 안도 바깥도 온통 우울한데, 혹시 내 우울과 당신의 우울이 만날까 두렵다. 늦은 밤, 카페 ‘산’ 대표인 후배 성식이 전화해서는 “형, 우린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아니에요?” 하고 묻고는 뭔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놨는데 졸려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생각나진 않는다. 다만 “조만간 밥 먹어요. 제가 살게요”라는 말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할 말을 마친 성식은 “형, 이제 혁재 바꿔줄게요” 하며 혁재에게 전화를 넘겼다. 그는 약간 취한 목소리였고, 로미 씨도 함께였다.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더니 “괜찮아요. 아직은” 했는데, '아직은'이라니? 사실 그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