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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후배 이재은 작가의 신작 소설집 『고독의 자격』(강, 2026.10)을 만났습니다. 일단 소설집의 제목이 '고독할 자격'이 아니라 '고독의 자격'이라는 것에 눈이 갔습니다. 전자(‘고독할’의) 주체는 인물이지만, 후자(‘고독의 자격’)의 주체는 고독 자체로 읽혔습니다. 작가가 의도한 명명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제목에서부터 이미 고독과의 관계나 현실 안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행위와 생각, 판단의 주체가 되는 걸 방해하는 다양한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읽는 내내 인물들의 상황을 추체험하며 화나고, 슬프고, 절망하다가 새로이 다짐하기 일쑤였습니다. 고독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반(反) 혹은 비(非) 고독의 상황들, 물론 그 상황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의도할 리 만무한 상황들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나의 ..
잎을 잃은 나무들의 건조한 피부 위로위로 같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모든 기억이 아름답진 않지만 아름다운 것들은 기억된다 가을에게도 기억해야 할 아름다움은 있을 것이다 이별을 만날 때마다 가장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 위해 가을은 지금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 문계봉, ‘11월’ 중에서 아침 출근할 때는 몰랐는데, 퇴근할 때는 날이 추워졌다. 강 특보는 교통사고(차량 접촉 사고)를 당해 결근했고, 보운 형은 외근 나갔다가 오후 3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종일 혼자서 근무했다. 이런 날은 음악을 틀어놓고 일할 수 있어 좋다. 낮에는 후배 병국(시인), 재은(소설가)과 통화했다. 지난번 함께했던 평화 백일장 심사료가 지급되는 다음 주쯤 셋이(나, 병국, 재은) 우리 동네에서 장어 모임 갖기로 의기투..
종일 비 내렸다. 비를 보며 ‘어쩌면 저리 예쁘게도 내릴까’라고 생각했다. 비는 고양이 걸음처럼 내렸다가 이내 거실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내렸다. 책상 앞에 앉아 자주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듣거나 빗물을 바라봤다. 하늘이 낮을수록 내 마음은 평화롭다. 오늘은 종일 평화로웠다. 가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멘델스존이나 비발디의 곡들을 들었다. 겨울에 듣는 멘델스존의 ‘봄노래’는 가슴을 몰랑몰랑하게 만들곤 한다. 그리고 ‘사계’의 ‘겨울, 2악장’을 찬바람이 완벽하게 차단된 실내에서 들을 때면 괜스레 눈물 난다. 그 부드러운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있으면 문득 어느 해 늦봄, 아이처럼 만났다가 어른처럼 헤어진 눈이 컸던 애인이 생각난다. 정작 애인들은 나를 완벽하게 잊었을 테지만, 음악..
내가 반드시 가야 하는 자리,반드시 가야 하지만 나 또한 기꺼운 자리,반드시 가야 하지만, 가고 싶지 않은 자리,나는 가고 싶지만, 나를 부르지 않은 자리, 나를 불렀지만, 가고 싶지 않은 자리, 부르지도 않았고 가고 싶지도 않은 자리…… 10월에는 행사와 모임이 많다. 부르지 않은 자리는 안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자리든 내가 가고 싶지 않은 자리는 치사하게도 이쪽 행사 핑계로 저쪽 행사에 안 간다. 이를테면 토론회나 전시 오픈, 연극 등은 가기 싫고, 보기 싫고, 참석하기 싫어도 예술가들 사이의 품앗이 차원에서 대개는 가거나 보거나 참석한다. 특히 내 출판기념회나, 나와 관계된 단체의 행사, 전시 등에 와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행사에 반드시 참석한다. 하지만 가끔 몸이 천근만근이거나 심리..
오전에는 혼자 사무실을 지켰다. 보운 형은 근무일이 아니고 강 특보는 출장 갔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었는데, 혼자 먹기 싫어서 정책연구소 안 아무개 선생에게 연락해서 함께 먹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인현동화재참사 27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학생교육문화회관에 들렀다. 추모식은 3시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다인아트 윤 대표로부터 1층 가온갤러리에서 추모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조금만 일찍 와달라는 연락을 받아서 30분 전에 도착, 전시회를 관람하고 추모식에 참석했다. 추모식에는 도성훈 인천시교육감과 유가족, 김찬진 제물포구청장, 인천시의회 교육위원회 위원 등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추모비 주변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허종식 국회의원(민주·동미추홀갑) 등의 추모 화환도 놓여 있었는데, 허 의원 등 ..
❚ 조정인 시인의 신작 시집『청색에 흘린 청색』(창비, 2026)을 소개합니다. 오래전에 만난 『장미의 내용』(창비), 『사과 얼마예요』(민음사)에 매료된 이후 조정인 시인의 열성 독자가 되어 시집이 나올 때마다 가슴 두근거리며 찾아 읽곤 했습니다. 시인은 이 시집들 이외에도 시차가 있는 두 권의 동시집을 내기도 했는데, 이러한 방향 전환(?)이 당시에는 의아하기도 했지만, 해당 동시집들―『새가 되고 싶은 양파』, 『웨하스를 먹는 시간』―을 꼼꼼하게 읽어본 느낌은 앞서 언급한 시집에서 받은 느낌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촘촘하면서도 세밀한 관찰,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표현들, 발견하고 깨닫는 즐거움을 주는 성찰적 시어 등 ‘조정인 시인만의 개성’이 동시집에서도 잘 드러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동..
후원의 밤(일일주점) 티켓이 홍수다. 관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사무실을 운영하다 보니 각급 단위와 단체들은 사무실 운영과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경상비와 인건비에 늘 허덕인다. 제 돈 갖다 바치거나 보급 투쟁하면서 운동했던 시절과는 많이 달라져서 몇몇 기간단체들은 시 정부로부터 인건비와 경상비를 지원받고 있고, 보너스와 퇴직금도 보장된다고 들었는데, 회원 회비와 후원금에 의존하여 활동해 온 조직들은 작금과 같은 반동과 퇴행의 시절, 활동의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이 동지의 주머니에서 나와 저 동지의 주머니로 돈이 옮겨가는) 폐쇄적 순환구조인 일일주점의 형태로 재정상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건지. 매년 돈 나가는 주머니는 대개 같은 (사람들의) ..
❚ 어제 김재석 작가의 개인전 오픈 행사 뒤풀이에서 만난 후배들과 얘기하다가 나는 문득 “세월이 너무 빠르더라. ○○가 청라지구 아파트 당첨됐을 때 하우스푸어 됐다고 푸념했는데, 그게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라고?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라니, 앞으로 또 훅하고 10년이 지나면 ○○나 나나 70대 중반이잖아. 그런데 뭔 미래의 계획을 짜고말고 해. 남은 세월 놀아도 부족할 판에 공부는 무슨 공부. 그래서 요즘은 눈치보지 말고 맘 가는대로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후배 창길이는 “그렇다면 놀 계획을 짜면 되잖아요” 하며 웃었다.나이가 들면 들수록 생각은 깊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도 자신 없다) 몸은 점점 더 망가지겠지..
종일 흐렸다. 낮 기온은 22도, 내 주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무척 더웠다. 노스페이스 바람막이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나왔는데도 그랬다. 퇴근 후 집에 올 때, 전철 안에서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안에 받쳐 입은 엠엘비 티셔츠의 목 카라와 어깨, 겨드랑이가 다 젖었다. 10월 말에 이렇게 땀 흘려 본 것도 오랜만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일러 예약 가동을 중지했다. 종잡을 수 없는 계절이다. 11시쯤 잘 알고 지내는 지역의 대선배와 그가 데리고 온 70대 남성이 사무실을 찾았다. 선배는 나를 보자 “어, 문 선생도 있었네” 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선배와 인사하고 그간의 안부를 묻는 사이, 보운 형이 행정국장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고, 네 사람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살짝살짝 들리는 목소리에..
시작하는 날씨는 춥지 않았다. 반소매 차림으로 테라스에 나가도 춥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원했다. 맑지는 않았지만,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오랜만에 산에 갈까 하다가 또 금방 그만두었다. 입고 갈 등산복이 없다는 이유를 찾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어제 보일러실을 청소하고 난 뒤 느낀 성취감이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문득 옷방이 생각났다. 겉으로는 잘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옷장 서랍을 열면 그 안의 내용물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서랍장을 열 때마다 ‘하루빨리 이 서랍장의 옷들을 정리해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파민에 절어 있던 어제의 기억은 자연스레 나를 옷방으로 이끌었다. 옷방에 들어가 5단 서랍장에 들어있던 옷들과, 상자에 담긴 채 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