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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종일 책꽂이 정리하고 앰프와 스피커 위치를 바꿔가며 음질 차이를 확인했다. 오디오 음질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앰프와 스피커의 성능이 아니라 어쩌면 해당 오디오 시스템을 설치한 공간(넓이, 높이, 장애물의 유무 등)이라고 말한 어느 오디오 비평가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확실히 같은 스피커도 어느 곳에, 어떻게 설치하느냐에 따라 음질이 천차만별이다. 나의 서재는 6평(4m×5m) 정도밖에 되지 않아 스피커를 놓을 위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조차 음질은 자리를 탄다(영향을 받는다).여전히 덥고 습하고, 열대야도 한결같지만 그래도 처서(處暑)가 지나니 확실히 한낮의 기온이 낮아졌다. 분명한 변화고, 당연히 유쾌한 변화다. 종일 켜놓고 지내던 에어컨을 하루에 한두 번 환기를..
11시 30쯤 청에 도착했다. 강 특보는 외근인지 보이지 않았고, 10시 20분쯤에 면접이 끝난 보운 형은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그냥 청을 나온 후 부평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내가 막 집을 나설 때쯤 형은 내게 전화해서 자신은 이상한 질문만 받아서 무척 곤란했다며, 면접 잘 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도 몇 차례 경험했지만, 문화예술 관련 면접관들의 질문은 대개 지원자의 생각과 업무 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질문자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질문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아마도 실제 특보들의 현장 업무에 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짜낸 질문을 가져왔을 것이다. 컴퓨터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아, 랜선을 연결하고, 톡으로 보낸 예상 질문과 대답을 출력해서 살펴보았다. 12시에 사무실 들어..
희한하다. 밤 9시가 되기 조금 전, 당신의 전화를 받았다. 마치 조금 전 헤어지고 집에 도착해 잘 들어갔느냐고 안부를 묻듯 명랑한 목소리로 당신은 물었다. “선배 뭐 하세요?” 나는 또 언제나처럼 기시감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늘 이런 식이다. 며칠 전 나는 8월에 만나기로 한 우리의 약속을 아쉬움 속에서 마음에서 지웠다. 그렇게 당신과의 약속을 잠시 잊기로 한 그날 이후 나는 엘라 피츠 제럴드의 엘피(LP)를 자주 들었다. 때로는 그녀와 루이 암스트롱이 함께 부른 노래를 들으며 오랜 기다림을 생각하거나 그리움이 감당해야 하는 마음의 무게를 생각하곤 했다. 다음 주쯤 아마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일 2시 면접이다. 응시 원서와 신분증을 들고 1시 30분까지 청사 1층에 있는 교육 사랑방으로 가..
오후가 되면서 맹렬하게 비 내렸다. 테라니 문을 열고 멍하니 빗물을 바라보다가, 큰누나가 생각나서 전화 걸었다. 비 오면 거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던 큰누나는 얼마 전 입주민 회의를 거쳐 누수 공사를 마쳤다. 공사 후에는 비가 새지 않는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전화했더니, 누나는 내가 전화한 것만으로도 감동받은 눈치였다. “큰누나가 걱정돼서 전화한 거야? 고마워 동생” 하는 누나에게 “당연히 걱정되지요. 이제 비는 안 새요?” 하고 물었더니, 누나는 “여전히 새긴 새는데, 전처럼 줄줄 새진 않아. 공사한 업자에게 하자 보수 신청하려고 해. 업자도 그랬거든. 건물 누수는 한 번에 딱 잡기가 어려워 몇 차례 공사를 반복해야 한다고. 그래서 카메라로 찍어서 업자와 우리 동 총무에게 보냈어” 했다. 여..
결국 이번에도 우리는 만나지 못할 거 같습니다. 늘 우리는 ‘조만간’ 혹은 ‘아무 날, 아무 시쯤’ 만나자는 약속을 잡곤 합니다. 그날(약속한 날)부터 나는 왕자를 기다리는 오후 3시의 여우가 되어 수시로 달력을 보고 날짜를 확인하며 구름 위를 걷듯 둥둥 떠다닙니다. 하지만 ‘아무 날, 아무 시쯤’은 정말 모호한 약속입니다. 그건 마치 십수 년 만에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조만간 식사 한번 같이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치레로 하는 말일뿐 결심이 담긴 말이 아니었던 거예요. 결국 우리는 열 번 중 7번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나도 막연했던 그 ‘아무 날, 아무 시쯤’의 약속을 위해 먼저 연락하지 않은 겁니다. 기다리던 나는 서운하다가, 화나다가, 마침내 슬퍼지기 시작할 때쯤 스스로 마음의 빗장..
어떻게 이렇듯 철저하게 멍해질 수 있는 거지? 불멍, 물멍, 사람멍(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 쳐다보기) 등 멍이란 멍은 다 해본 사람인데, 요즘은 한술 더 떠서 눈 앞에 보이는 특정한 대상 없이도 그냥 멍해질 수 있는, 그야말로 멍때리기 신급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모든 멍때리기는 머릿속을 무념무상의 상태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건 수십 년 면벽 수도한 선승도 힘든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멍때리기란 그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하여 바로 눈앞의 현실, 현안에 관한 관심을 잠깐 접어두게 하는 것, 그리하여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는 안 좋은 기억, 미래에 필연적으로 만날 불행한 일, 온갖 사념 등을 다른 생각, 즉 내가 감당할 수 있거나 덜 불행한 상상으로 치환하거나 희석하는..
10시쯤 교육청 홈페이지에 (특보 공모) 서류심사 합격자 명단이 올라왔다. 문화예술 교육 정책 분야에는 10명이 지원, 최종 면접에 올라온 지원자는 4명이었다. 작년 9월 재임용 당시와 같은 숫자다. 6년 전, 처음 입사할 때는 (최종 면접 기준) 6명었는데, 작년과 올해 두 명이 줄어서 경쟁률은 낮아졌다. 언론 특보는 7명이나 최종 면접에 올라왔다고 하니, 그래도 그쪽보다는 나은 편이다. 보운 형이 지원한 노동 특보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지원자가 보운 형 한 명뿐이다. 가부를 판단하는 면접이니 그래도 다수와 경쟁하는 나보다는 맘이 편하겠지. 이번에도 젊은 지원자가 많았는지 모르겠다. 매번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40대였는데..... 다만 나보다 유능하고 똑똑한 지원자들은 많겠지만, 나만큼 교육감..
일어나자마자 예보를 확인하고, 이불과 침대 커버를 빨랫줄에 널었다. 한낮의 강한 볕이 이불과 커버를 뽀송하게 만들었다. 내친김에 두 개의 베개도 갖다 널었다. 내 칙칙해진 머릿속도 빨래처럼 볕에 내놓고 말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의식과 영혼에 낀 무기력과 타성의 습기를 걷어내고, 오래전 잃어버린 명민함과 눈물, 발칙한 상상력을 되찾고 싶다. 오랜만에 폴 모리아 밴드의 연주곡을 듣는다. 어코디언인가, 멜로디언인가, 소리 참 아련하고 애잔하다. 저 음악이 내 곁에 있을 때, 나는 젊었고, 꿈도 많았으며, 용감했다. 그때 내가 걷던 길 위에서 만난 사람, 그들과 함께 담았던 풍경들, 생각난다.
비 예보에 내심 기대했는데, 이발하고 돌아올 때 분무기로 분사하는 미스트처럼 내린 감질나는 이슬비가 다였다. 그나마도 집에 돌아와 밥 먹을 때쯤 이내 그쳤다. 그것도 비는 비니까 예보가 틀린 건 아니다. 오랜만에 채소 가게에 들러 장을 봤다. 오이와 달걀값이 많이 올랐더라. 그래도 하루에 삶은 달걀 두 알은 빼먹지 않고 먹어야 해서 값이 비싸도 살 수밖에 없다. 서민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단백질 덩어리니까. 오랜만에 들렀기 때문에 무나 배추, 마늘쫑과 감자 등 채소나 부식을 더 사고 싶었지만, 카트를 가져가지 않아서 오이, 애호박, 두부, 마늘, 깻잎, 풋고추, 팽이버섯, 달걀 1판만 샀다. 수박도 5천 원밖에 하지 않았지만, 들고 오기 무거워서 그만뒀다. 돌아오는 길에 단골 미용실에 들러 이발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