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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오늘은 홀로 사무실을 지켰다. 두 명의 선배는 모두 출장 중. 비는 종일 내리고, 흐르는 물 위를 바람에 떨어진 꽃들은 둥둥 떠다니고, 청사 복도에는 젖은 우산들이 버섯처럼 피어 있었다. 비서실에 들러 카누 커피를 얻었다. 은영 주무관이 환하게 웃으며 "또 필요한 거 없어요?" 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담긴 호의가 고마웠다. 휴가에서 돌아온 모 주무관도 "4.16 추모제 원고 잘 받았어요" 하며 일어나서 꾸벅 인사했다. 비서실장은 파티션 아래로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지난주 교육감의 콜럼비아 출장을 수행하고 돌아온 박 비서도 역시 통화 중이었다. 모두가 빗물처럼 부산했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혼자 먹었다. 현미밥에 돼지고기 짜장볶음, 샐러드, 백김치, 총각김치, 달걀 게살국, 거봉 ..

4월에는 하늘에 들지 못하고 떠도는 중음신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4월의 눈가는 늘 젖어 있다. 어제 세월호 추모문화제가 있던 날, 점심 나절부터 내린 비는 오늘 새벽까지 이어졌다. 우세가 제법 거세기도 했고, 한밤중에는 비가 얼어 진눈깨비로 내렸다. 4월에 만나는 진눈깨비라니, 이것만 봐도 예사롭지 않다. 비는 잠깐 그쳤다가 종일 오다 말다 했다. 아침에 일어나 속이 쓰려서 라면과 순두부를 넣고 끓여 먹었다. 운동하고 청소한 후, 인터넷 쇼핑으로 포기김치와 갓김치를 주문했다. 오후에는 누나가 탈모 예방에 좋다는 건강보조제와 상추, 깻잎, 풋고추, 방울토마토 등을 사다 주었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김치는 너무 쉬어서 돼지고기를 사다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슈퍼에 들렀을 때, 아이스크림과 우유도 함께..

세월호 참사 11주기 추모제는 인천시청 1층 로비에서 진행되었다. 밖에서 진행하다 비가 내려 실내로 들어온 게 아니라 비가 올 거라는 예보에 주최 측에서는 애초부터 시청 현관에 무대를 설치했다. 시작 30분 전쯤 현장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큐시트를 손에 들고 분주하게 오가는 은진을 만났다. 이번 행사의 총감독을 맡은 모양이었다. 나를 발견한 은진은 “어, 형, 잘 지냈어요?” 하며 다가와 포옹했다. 작년 여름 만났을 때보다 조금 마른 것 같았다. “정혁이랑 같이 안 왔어?” 하고 내가 묻자 “따로 오긴 했는데, 아마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했다. 이곳저곳 둘러보며 사람들과 인사하고, 참여 프로그램 부스에서 책갈피도 만들고, 만보기로 2분 동안 416걸음을 걷기도 했다. 식이 시작될 때쯤 세월..

날은 따듯했고 미세먼지는 많은 날이었다. 먼지 때문에 산책은 안 했다. 보통 아침을 먹지 않지만, 술 마신 다음 날은 해장을 위해 라면을 먹는다. 오늘 아침에는 라면에 순두부와 깻잎, 양파, 순두부를 넣어 먹었다. 속이 풀리고 기분도 좋아졌다. 운동하고 청소하고 음악 듣다 보니 금방 점심때가 되었다. 점심에는 냉국수를 끓여 먹었다. 소면에 사놓은 냉면 육수를 넣어 먹는 건데, 내가 쓰는 육수는 칠갑 제품이다. 은준은 청수 제품을 강권했는데, 다음에는 청수 냉면을 구매해 볼 생각이다. 오후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순댓국집을 다녀왔는데, 전혀 춥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에어컨을 켰다. 저녁 먹고 실내 자전거 위에 앉아 페달을 돌리면서 문득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군. 정말 쏜살같아’..

비가 잠깐 왔으나 이내 그쳤다. 시인의 방에도 봄은 왔는데, 정작 있어야 할 시는 없었다. 시가 없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한때는 내란에 준하는 극단적 정치 상황과 윤의 몰염치한 행보가 내 문학적 게으름의 원인이라고 자기 세뇌했는데, 사실 그건 치사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래도 봄은 왔고 꽃은 피었다. 비와 바람이 꽃송이를 떨어뜨려도 연일 꽃들은 팝콘처럼 터졌다. 그리고 아직도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윤은 용산 집무실을 나와 사저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다시 또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긴 했지만, 그래서 더욱 한심하고 코미디 같았다. 마지막까지 팔푼이 짓을 하다니, 그런 점에서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다. 저런 팔푼이가 나라를 대표했다니, 국가의 품격은 지금 만신창이가 되었다. 빨리 감옥으로 보내는 게 ..

전날 일찍 잠든 탓에 새벽 2시쯤 잠이 깼다. 꽤 오랜 잔 줄 알았는데, 새벽 두 시라서 당황스러웠다.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을 감상했다. 다소 부드러워지긴 했으나 블랙코미디 속에 담긴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현대 사회의 비인간화에 대한 봉준호 감독 특유의 풍자적 비판은 여전했다. 결말은 이전 작품과는 달리 명백하게 행복한 결말! 다만 SF 영화치고는 사건 전개가 다소 늘어지고, 영화에서 다루는 주제도 너무 많아 조금 산만한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과 생명 경시 풍조, 빈부 격차와 계층 간의 갈등, 환경 파괴와 자기 복제 시대의 정체성 문제 등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영화 속에 녹였다. 따라서 관객들의 호불호가 나뉠 듯하다..

전 세계가 멍청이 트럼프의 폭주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함량이 한참 모자라는 인물에게 천조국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안겨주니, 이건 뭐 폭주 기관차와 다를 게 없다. 극단적 백인우월주의자인 그는 관세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외국인 체류자들을 강제 추방하여 그들을 안전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어 인권단체들로부터 지탄받고 있으며, 온갖 쇼맨십으로 정치를 희화화해 가까웠던 우방들은 서서히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이런 트럼프의 대책 없는 독주가 계속될 경우, 반사회주의 유럽 벨트와 아시아 벨트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트럼프가 허튼짓할수록 중국의 시진핑이 미소를 짓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시진핑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다. 자본주의 연대가 내부 총질로 인해 느슨해지고 있..

오랜만에 날이 참 좋았다. 전형적인 봄날씨였다. 청사 주변의 백목련들이 큼지막한 꽃송이를 마구 내밀고 있었고, 시청 앞 화단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손가락 염증 치료받으러 병원 가는 길, 지난주보다 더욱 파릇해진 꽃나무 새순들을 보면서 이제 꽃샘도 더는 없고 먼지도 없는, 그런 봄날만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 년 중 며칠 안 되는 봄마저 잃고 싶지 않다. 의사는 내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아직 절제할 단계는 아니라며 약(항생제) 처방만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종일 통증에 시달렸다. 일단 약을 먹고 내일까지 견뎌보겠지만, 암만해도 그냥 수술받고 나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전문가가 알아서 판단했겠지만, 왠지 모르게 다시 병원을 방..

지난밤 음주 탓에 늦게 일어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깼다. 숙취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방에 가서 우유를 한 잔 먹는 순간 구토가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른 때 같았으면 오히려 우유가 쓰린 속을 달래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침대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나서 걷다 보니 약간 어질어질하기도 했다.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온 후, 꿀물을 타서 마셨더니 속이 차분해졌다. 미세먼지가 보통 수준이라고 해서 창문을 열고 잠깐 환기했다. 시원한 아침 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다가 다시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확실히 몸이 개운해졌다. 허기가 느껴져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식탁에 앉아서 TV 뉴스를 보며 느긋하게 밥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며칠 사이에 집안의 화초들이 더욱 화사해진 것 같다. 실상 봄이 깊어지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사람은 본디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법이니, 내 마음이 밝아졌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종일 보지 않던 뉴스를 시청했다. 방송마다 탄핵 인용 소식과 광장의 환호성을 전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부아가 치밀어 보지 못했던 정치 뉴스들을 맘 편하게 볼 수 있게 돼 고맙고도 감격스러웠다. 저쪽 사람들은 마찬가지 이유로 뉴스 보기가 괴롭겠지. 한편으론 괘씸하고 고소한 생각도 들긴 하지만, 같은 나라 국민이 서로 적대적 관계가 되어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살풍경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이 저지를 일 중에 가장 나쁜 일이 국민을 양분시킨 것이다. 따라서 차기 정부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과제는 찢기고 갈라진 국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