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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여당 후보 김문수 씨가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망월동 묘역에 들렀던 모양인데, 일부 시민들이 ‘윤석열의 탄핵을 반대한 김 씨의 참배는 광주 민주 영령들을 모독하는 것이자 5월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참배를) 반대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럴 만한 일이다. 민주주의를 근간부터 망가뜨린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으니, 그 또한 국정 혼란에 일정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내란 수괴 윤석열의 탄핵을 반대한다면서 국민에게 사과하기를 거부한 한 인물이다 보니 광주 시민들은 김문수의 참배를 거부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의 행위가 선거 때만 되면 후보들이 앞다투어 보여주는 쇼맨십이거나 사진 촬영용 참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도무지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미친 목사 전광훈..

80년 광주를 생각하면 여전히 눈물 난다. 당시 17살 소년이던 나는 이제 60대가 되었다. 비록 당시에는 광주의 실상을 몰랐으나 대학 시절, 비어처럼 소문으로만 떠돌던 광주의 실상을 접하고 난 후,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건 자본의 세상에 편입하기 위해 책을 읽고 수업을 듣던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거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신들, 태극기로 덮인 즐비한 관들과 오열하는 노인들, 무장한 시민군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공수부대원들의 살기 띤 눈동자 등 컬러 TV 화면에 펼쳐진 그 살풍경한 장면들을 보는 순간 내가 생각하던 나라, 내가 꿈꾸던 미래는 사라졌다. 경악과 공포에서 시작해 분노와 오열, 섬뜩한 깨달음으로 이어진 스무 살 시절의 그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경찰과 모든..

예사롭지 않은 빗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처럼 늦봄 아침, 침대에서 듣는 장한 빗소리는 내게 축복이다. 빗소리에 잠에서 깨는 이런 날은 종일 마음이 부풀어 지내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창문을 열고 비의 기세를 확인한 후, 부리나케 주방을 건너가 테라스 문을 열었다. 빗물 소리가 더욱 요란했다. 듣기 좋은 백색소음이었다. 한동안 비 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방으로 돌아와 침대를 정리하고 양치를 한 후, 삶은 달걀 하나와 토마토를 우유와 함께 먹은 후, 한 시간 동안 실내 자전거를 탔다. 이 시간은 (자전거 위에서) 뉴스를 보거나 SNS를 통해 세상과 내 지인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동시에 나의 안녕을 고마워하는 시간이다. 대선을 앞둔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큰 차이로 앞서나가고 있었다. 당연..

언제부터인가 속이 빤히 읽히는 사람들을 봐도 기분 나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와 같은 유형, 즉 자신의 솔직함 때문이 아니라 의도가 너무 강력해, 돌려 말하려는 생각과는 무관하게 속을 읽히고 마는 미숙한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자주 상대하다 보면 짐짓 모르는 체하며 골려주고 싶은, 고약한 악취미가 생기거나 상대의 말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기기 때문이다.❚오늘 십수 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구 S에게서 전화가 왔다. 통화 초반에 잠깐 “잘 지냈어?”와 같은, 그야말로 진부한 인사,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간 보기용 안부 묻기가 이어지다가 잠시 후 전화를 건 본래의 목적에 해당하는 말이 나왔다. “이번 토요일, 우리 딸이 결혼해”. 그런데 의외였던 건, 속으로 ‘그거였어?’ 하고 생..

오전에는 시장 가서 채소들을 샀다. 좋아하는 오이 가격이 많이 내렸더라. 사소하지만, 기뻤다. 누나가 사다 준 오이가 남았지만, 싸서 아무 생각 없이 한 봉지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요 며칠 후에 왔을 때 크게 올랐으면 서운할 것이다. 달걀 가격은 500이 올랐지만, 크기는 먼저 사 먹던 달걀보다 조금 커 보였다. 그렇다면 값이 오른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나처럼 질보다 양, 저렴한 가격에 목매는 사람은 달걀도 굵기보다 개수(個數)다. 개수가 같은데 가격이 비싸다면 오른 것이다. 희한한 가격 감각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희한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오후에는 점차 흐리더니 비가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비가 아닌 건 아니다. 비를 서운하게 할 생각은 없다. 문을 닫고 잠을 자면 땀이 난다. 기온이..

오랜만에 미추홀구(주안동)에 있는 일식집 ‘삼원’에서 고등학교 후배 L과 R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었다. ‘삼원’은 오래전에 수홍 형과도 자주 들렀었고, 친구들과도 자주 들렀던, 그 옛날의 단골집이다. 하지만 주된 활동 공간이 만수동과 구월동으로 붙박이게 되면서 주안 쪽에는 갈 일이 없어 이곳에 안 간 지 꽤 오래다. 오늘 어언 10여 년 만에 들렀는데, 명불허전, 음식도 분위기도 예전 그대로였다. 식당은 모름지기 주인이 바뀌어도 맛은 바뀌지 말아야 하는 법, ‘삼원’은 여전했는데, 그게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전통 대물림 음식점이란 타이틀처럼 앞으로도 이곳이 그 명맥을 유지해, 언제든 찾아가도 추억의 맛을 맛볼 수 있는 명소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오늘 자리는, 약사인 R이 마련하였다. L과 R은..

전형적인 초여름 날씨였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한낮의 기온이 22도까지 오른다고 해서,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출근했다. 물론 레이어드룩을 위해 안에 흰색 티셔츠를 받쳐 입어서 홑 티셔츠를 입었을 때처럼 춥진 않았다. 오전부터 아는 선배들과 지인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쳐 시끌벅적했다. 나를 만나러 온 건 아니고, 김 목사의 주선으로 교육감과 함께 점심 먹으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원래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사람들이라서 그들의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고 일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도 그 테이블에 끼어들어 수다를 떨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11시 30분쯤 식당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최모 교수가 “문 시인도 같이 가는 거지요?” 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요, 저는 약속이 있어요. 다음에 함께해요. 선배..

조지아의 조용한 산골 마을. 도시에서 시골로 돌아온 ‘이바’는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곤돌라의 새로운 승무원이 된다. 그렇게 승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바’는 반대편 곤돌라 승무원 ‘니노’와 자꾸만 눈이 마주친다. 농부와 아이들, 가축과 포도주 등을 실어 나르며 두 사람 사이에 오가던 시선은 서로를 향한 장난스러운 몸짓, 체스 한 수, 멜로디 한 조각이 되고 나중에는 서로 경쟁하듯 새로운 아이디어로 곤돌라를 치장하여 (곤돌라를 배, 우주선, 기차 등으로 꾸며) 상대에게 웃음(호감, 마음)을 준다. 그렇게 곤돌라가 교차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점점 커간다. 영화는 이 모든 마음의 변화 과정을 무성영화처럼 대사 없이 몸짓과 눈빛만으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국민의힘 지도부의 일일천하가 망신살 속에서 끝이 났다. 어젯밤과 오늘 새벽, 자당의 대선 후보를 전격적으로 교체하려고 했다가 여론과 당원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사퇴했다. 그리고 오늘 오후 지도부에 의해 후보 지위를 박탈당한 김 씨는 법원 판결을 통해 다시 지위를 회복했다. 일국의 여당에서 벌어진 저질 코미디 같은 일이다. 쫓겨나기 직전에 기사회생한 김 씨나 윤가의 복심으로 내란의 공범이면서도 슬며시 대선판에 숟가락을 얹은 한 씨나 정치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그야말로 도긴개긴이지만, 각각의 인물평은 차치하고서, 어떻게 공당의 정치 행위가 이리도 천박한 건지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다. 도대체 이번 조기 대선이 무엇 때문에 치러지는지 모른단 말인가? 바로 자당 출신 대통령의 ..

종일 비 내렸다. 오전에 그치려니 했는데 오후까지 내렸다. 이렇게 추적추적 종일 비 내리는 날이면 마음도 빗물에 둥둥 떠다닌다. 그냥 좋다. 이런 날은 마음도 순해져서 내게 상처 준 누군가의 실수도 눈감아 줄 듯하다. 내 소중한 봄날은 빗물 속에서 저무는데,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있는 곳에서 안녕하신가요? 비가 온 탓에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김 목사님과 둘이 먹었다. 일부러 늦게 식당을 찾아 줄 서지 않고 곧바로 먹을 수 있었다. 국 대신 내가 좋아하는 닭 수프가 나왔고 오이와 상추 샐러드가 메뉴로 나왔다. 맘에 드는 메뉴였다. 오후에는 음악을 듣거나 밀린 일기를 썼다. 마치 군대의 말년 병장처럼 지냈다. 최근 들어 (퇴사할 때가 다가오니) 곤란하거나 귀찮은 일은 주무 부서 팀장이나 장학사들이 대신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