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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나의 주말은 너무 평온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나는 나의 평온함의 근거와 정체를 의심하기 때문에 오늘 같은 평온함이 나에게는 오히려 불편하다. 마치 내 몫이 아닌 행복을 임시로 맡아두었거나 공짜로 누리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라 공원에라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울 앞에서 몇 차례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관뒀다. 집 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일부러 할 일을 찾아서 했다.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꽉꽉 눌러놓거나 서가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서랍장의 양말을 손 볼 게 없는지 찾아보다가 그만두고 채소를 사러 가게에 다녀왔다. 날이 너무 좋아 긴팔 패딩을 벗고 조끼 패딩을 입고 외출했는데 전혀 춥지 않았다. 봄기운이 완연했다. 가혹한 정치와 탐욕의 화신들만 아니었다면 참 아름..

점심때, 함께 밥 먹자고 누나들이 전화했지만 거절했다. 공기도 안 좋고, 나가기도 귀찮았으며, 그때 나도 점심 먹으려고 냉동실에 얼려놓았던 된장찌개를 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들은 결국 저녁에 족발 대(大) 자를 사들고 집에 왔다. 심심했던 큰누나가 작은누나를 부추겼을 것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좋아하는 족발을 곁들인 저녁을 누나들과 함께 먹었다. 큰누나는 달랑 고기 서너 점을 먹더니 "나는 됐어. 그냥 너네들이랑 같이 식사하는 게 좋은 거지, 많이는 못 먹어. 이 만큼이 정량이야" 하며 젓가락을 놓았다가, "그래도 몇 점 더 드셔" 하는 작은누나의 말을 듣고는 내가 끓여놓았던 된장찌개에 밥 3분의 1 공기를 더 먹었다. 결국 작은누나와 나는 "남겼다 먹으면 맛없어. 다 먹어야 해"라고, 누가..

원래는 내일 윤의 탄핵에 대한 헌재의 재판 결과가 나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오늘 밤, 선고 전 마지막 촛불집회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구월동 로데오 거리에서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민주주의 회복의 염원을 모아 촛불집회를 개최했다. 간절함 때문인지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집회에 참석했다. 그동안 공직자라는 신분 때문에 집회 현장에 자주 나가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나도 현장에 참석해서 사람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최근 헌재는 윤 말고도 다른 인사들의 탄핵 재판도 진행하고 있어 일정이 너무 빡빡하고, 무엇보다 윤 탄핵 재판의 경우, 통일된 의견이 만들어지지 않는지 선고가 일단 다음 주로 연기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는 다시 또 피 말..

전 비서실장 H가 마련하는 오찬 자리에는 이번에 처음 참석했다. 나 빼고 네 명(H, 김목, 소통협력실 윤, 마을교육팀 김, 보운 형)은 그간 자주 만나왔다. 그때마다 보운 형은 나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H가 직접 전화해 참석을 종용했다. 워낙 사람 좋고 유순한 H의 제의라서 이번에는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빠지면 일부러 피한다고 오해할 것 같았다. 점심시간, 소통협력실 윤의 차를 타고 H의 사무실로 가서 담소를 나누다가 다시 구월동 민예총 근처 김치찌개 잘하는 식당('맛소리')으로 이동했다. 만나면 늘 이곳으로 식사하러 왔던 모양인지, 우리가 들어가자 사장이 아는 체했고, 일행들도 자연스럽게 맞장구치며 인사했다. 우리는 김..

둥지냉면을 발견한 건 나에겐 크나큰 행운이다. 청수냉면이나 칠갑농산, 면사랑과 봉피양, 교동식품과 제일제당 등 다양한 회사의 봉지 냉면 제품과 육수들을 먹어봤지만, 최근에 먹어 본 농심의 ‘둥지 냉면’이 가장 맛있다. 그래서 온라인 쇼핑으로 넉넉하게 사놓았다. 물론 입맛은 사람마다 달라서 다른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 주관적인 입맛으로는 둥지 냉면이 최고다. 일단 면발과 육수 모두 냉면 전문 식당에서 먹는 것과 맛이 그중 비슷하다. 그래서 엊저녁도 오늘 저녁도 둥지 냉면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물론 나는 냉면에 다양한 채소, 이를테면 상추, 숙주, 깻잎, 오이, 사과, 토마토 등 냉장고에 있는 각종 채소와 과일 슬라이스, 달걀을 넣어 먹는다. 그러다 보니 종종 육수가 모자라 칠갑농산의..

대기질은 종일 최악이었다. 나날이 화생방 훈련을 하는 기분이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비번이었지만, 보운 형이 강화 난정평화교육원으로 1박 2일 출장 간 탓에 사무실을 ‘지키려고’ 출근한 거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마을 교육 담당관인 김 선배는 헤드폰을 쓴 채 뭔가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이발을 했는지 머리가 단정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인아트 윤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엊그제 교정 끝낸 자서전의 저자가 본문 내용에 첨가해 달라며 추가 원고를 보낸 모양이었다. 교정해서 본문에 넣은 후, 재편집해서 윤 대표에게 보냈다. 윤 대표는, 소설집을 내달라며 누군가 가져왔다는 원고지 1,500매 분량의 소설 원고도 내게 보내며 “선생님, 이거 출판해도 되는지 어떤지 한번 읽어봐 주세요. 내가..

천안에 있는 후배가 변산바람꽃과 노루귀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지척의 봄을 사진에 담아 보내준 것이다. 공기질만 좋았다면 공원이라도 찾았을 텐데...... 그러나 봄은 산과 들판, 공원과 거리에서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봄은 내 옷장과 책상, 책꽂이와 창틀에도 있고, 냉장고와 신발장, 테라스의 화초들 위에도 있다. 또한 봄은 내 마음속에도 들어와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고 있다. 이 몽글거리는 떨림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처음 새순을 내미는 꽃나무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그렇다면 이 봄에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이 느낌, 믿어도 될까? 해마다 이맘때면 봄의 충동질에 마음이 온통 소년처럼 부풀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흘러가 버린 여느 해의 봄처럼, 올봄도 마음만 실컷 부풀..

오늘은 한국작가회의 총회가 있는 날이고, 117번째를 맞는 여성의 날이며, 탄핵 촉구 시민행동의 날이기도 했다. 날씨는 포근하고 맑았다. 친구들은 산에 갔고, 문우들은 총회에 갔으며, 동지들은 집회에 참석했다. 나는 어제 늦은 밤에서부터 오늘 새벽까지 유튜브에서 ‘양자물리학’과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강의를 듣느라 잠을 못 자서 느지막이 일어났고 종일 피곤했다. 결국 아무 데도 안 가고 집에서 영화나 보고 가끔 운동하고 과식하며 죄스러울 정도로 편안하게 보냈다. 끝내 뉴스는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 큰 용기(?)를 내서 시청해 보려 했으나, 화면 가득 비열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꼴보기 싫은 악마의 얼굴이 자꾸 나타나 가슴이 턱 막히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서 이내 뉴스 보기를 포기할 수밖에..

희한하게 금요일만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특히 오늘처럼 봄을 재촉하는 3월의 금요일은 더욱 그렇다. 오래 전화가 없던 사람의 연락을 뜬금없이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친구와 지인을 만나 술을 마셔도 이튿날부터 연이틀 휴일이라 별로 부담이 없다는 것도 금요일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이런 날은 내가 한없이 너그러워져서 누구나 내 마음에 들어와도 막지 않는 날이다. 아니 오히려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렇다고 정말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어오거나 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마음의 물결 상태가 그렇다는 말이다. 가끔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서 잠긴 빗장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쓴 적이 있다. 그래서 결국 상대의 마음에 들어가 꽃을 심기도 하고, 끝내 열지 못하고 뒤돌아서기도 ..

민주화센터의 업무가 많아져 새 직원을 뽑게 되었는데, 자문위원 중 한 사람을 반드시 심사위원으로 위촉해야 했던 모양이다. 어제 퇴근길에 급하게 연락받고 오늘 아침 센터에 심사하러 갔다. 처음 사무처장 L의 전화를 받았을 때, 될 수 있으면 나 말고 다른 위원에게 연락해 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결국 내가 가게 되었다. 하긴, 심사 하루 전에 연락해 오전 2시간 정도를 뺄 수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시간 내기 곤란했을 것이다. 약속 시간(10시)보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직원으로부터 심사와 관련한 참고 사항을 브리핑받고, 접수된 지원자들의 신청 서류들을 검토했다. 민주화센터에서 1차로 서류 심사를 진행해 최종 4명만 올려 보냈기 때문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