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배선옥, <오랜지 모텔> 중 '삼막사 백구' 전문 본문
삼막사 백구
한 떼 회오리가 창자를 훑고 지나갔다 오래 묵은 단풍나무 뿌리 젖은 흙을 뒤집어 쓴 채 끌려나와 내팽개쳐졌고 모래 잔뜩 낀 여린 손톱들 젖은 빨래처럼 아카시 등걸에서 펄럭였다 햇살은 어젯밤 순장당한 처녀의 낯빛 때늦은 채송화 그 심난한 폐허 속에 골난 계집아이처럼 앉아 낙서만 해댔다
가끔 바라보곤 했지만 먼저 아는 척하진 않았다 산문(山門)을 나서다 다시 마주쳤을 때 귀때기와 목덜미를 쓰다듬어 작별인사를 건네며 두툼한 앞발이나 잡아보려는데 흠칫 몸을 비키던 녀석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내 앞에 모로 드러누워 지그시 눈을 감는다
혹시 우리 한 시절 스쳐갔었는지 모르지 잠시 만나고 오래 헤어지느라 윤회의 바퀴를 돌리는 인연일는지도 어느 전생에다가 녀석을 내려놓고 일어서는데 억센 터럭 끝에 대롱거리는 산바람 참 까실까실하다
◆◆
가끔 만나는 사찰의 개들은 희한하게도 눈빛이 그윽하다.
염불과 목탁소리를 들으며 저도 예불을 드려왔던가.
어쩌면 전생의 어느 영혼이 윤회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사찰의 ‘백구’로 태어난 것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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