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서평] 불면은 때때로 나를 깊게 만든다 본문
[서평]
불면은 때때로 나를 깊게 만든다.
―문계봉, 『너무 늦은 연서』, 실천문학사, 2017
김경철 시인
나무무늬가 선명한 관,
바람에 흔들리는 조등,
짖지 않는 개,
문밖 버려진 링거 병 속에서 들려오는
사신의 휘파람 소리,
―문계봉, ‘죽음의 얼굴’ 부분
기계의 적은 먼지이고 바위의 적은 물방울이다. 그렇게 단단할 것 같은 강함은 부드러움에 의해 무너진다. 천년 바위를 뚫는 저 물방울을 보라! 한 방울 한 방울의 적의는 얼마나 하찮은가? 여기, 문계봉 시인의 시집 『너무 늦은 연서』를 통해 나는 부드러운 적의를 본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옛 성현의 말씀은 언뜻 들어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나, 그것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살면서 금세 알 수 있다. 혹 부드러운 것이 약한 것은 아닌지? 약함과 부드러움을 구별할 수 없다면, 혹 부드러움이 관용은 아닌지? 그것은 또 너그러움과 구별할 수 없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이것이 구별되니, 이 또한 얼마나 힘든 성찰이겠는가?
이 시집을 읽다보면, 똑같은 제목의 시 두 편을 만날 수 있다. 바로 45쪽에 나오는 ‘불면’과 111쪽의 ‘불면’이라는 시이다. 불면을 좀 강하게 읽으면 불멸(혹은 분열)이 될 것 같은 좀 썰렁한 상상을 해보면서 불면을 생각해 보면, 불면은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를 말한다. 불면은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를 말한다. 불면은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불면은 깨어 있으면서 잠들어 있고 잠들어 있으면서 깨어 있다. 이 중간 상태, 마치 이승과 저승의 중간 상태인 구천을 떠도는 느낌이랄까? 물론 죽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무순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이미 본 세계와 닮아 있다. 불면은 마치 삶의 바깥을 거니는 느낌이고 죽음의 바깥을 거니는 느낌이다. 불면은 마치 삶도 아니요, 죽음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시인은 말한다. “불면은 때때로 나를 깊게 만들어(‘불면-운유당 서신’) 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깊이란 무엇일까?’ 그 옛날 강태열 시인이 “요즘 뭐 하고 사냐?”고 물었을 때, “아무 것도 안 하고 산다”고 말했더니 나보고 “깊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깊이란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 때 깊어지는 것일까? 마치 북방의 소림사 절에서 오랜 시간 아무 것도 안 하고 벽만 보고 살았던 달마가 때가 되어 밖으로 나온 것처럼, 깊어지기 우해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마치 불면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수면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가수면 상태를 시인은 “자객의 암기에 심장을 맞은 것처럼, 미인계에 걸려 몽혼약을 먹은 것처럼, 새벽의 그 겸손한 적요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불면―운유당 서신’)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자객의 암기에 심장을 맞은 적은 없지만 심장을 맞은 것처럼 아파오고 미인계에 걸려 몽혼약을 먹어본 적이 없지만 먹어본 것처럼 환상적이다. 불면의 이중성! 아프면서 환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깊이란 이 이중성을 구별하는 것일까? 혹은 체험하는 것일까?
그럼 아픈 것부터 생각해 보자. “미래가 던지는 몇 마디의 농담에도/발끈 불안하여 세월의 멱살을 잡는/눈물겨운 공격성”(‘자화상’)은 정말 “자객의 암기에 심장을 맞은 것처럼”(‘불면’) 아프다. 미래가 던지는 몇 마디의 농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난하고 주권이 없는 국민은 눈물겨운 공격성을 보일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권리란 그 나라 국민일 때에만 가능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난은 권리를 가지 않은 국민의 것이란 뜻일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과장되게 얘기하면, 권리를 갖지 않은 국민은 이 나라 국민일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이 과장된 얘기는 극단적으로 저 로마 시대에 살던 호모 사케르를 호출한다. 짐승처럼 죽여도 법적으로 아무 제재를 받지 않는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마, 아감벤이 그의 책, 『호모 사케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픈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픈 것’에 대해 몇 가지 더 살펴보자. “혀가 잘린 사람들”, “입이 틀어막힌 채 소리 없이 유배되”(‘그들만의 공화국’) 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이다. “보듬어야 할 것들을 보듬지 못한 채/머물러야 할 곳들에 머물지 못한 채”(‘밤길’) 사는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이다. “한때 세상을 바꾸려 했던 그가/바뀐 세상에서 비틀거리”(‘그는 더 이상 진보적 잡지를 읽지 않는다’) 사람도 아픈 사람들이다. “싸움이 없는 시대의 향수이고 그리움으로/한 때의 훈장으로 그리하여 끝내는 자괴감으로”(그리움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사는 사람도 아픈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왜 아픔은 인간을 깊어지게 하는가? 아픔은 나도 남도 아닌 상태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불면처럼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아픔은 그렇게 나와 남 사이에 머물러 있다.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마치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원통하고 분하고 한스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난하고 권리를 갖지 못한 국민들은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국민도 아니고 국민이 아닌 것도 아닌, 마치 불면처럼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닌 투명한, 유령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유령, 동양적으로는 귀신인 이 유령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유령들을 공백이라 표현했고, 이 공백들이 모여서 마치 프랑스 혁명처럼 사건을 일으키면 자유, 평등이란 이념이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자유, 평등이란 이념은 원통하고 분하고 한스러운 귀신들의 위령제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귀신들의 한을 풀어줘서 좋은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아픈 것’은 얘기했으니, ‘환상적인 것’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필자는 깊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먼지 앉은 원전의/겉표지를 젖히고 나와/모자 위 눈을 털며 숙소의 불을 켜는/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다시 잠 못 드는 밤에’)을 상상해 보면, 확실히 환상적이다. 죽은 이를 호출하는 이 시는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아닌 혁명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레닌은 마치 죽었는데 죽지 않은 사람처럼, 유령처럼, 유배지 시베리아의 넓은 설원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개발 지역은 마치 밤마다 유령이 떠돌고 있을 것처럼, 귀신이 나올 것처럼 무섭다. 이러한 환상은 공포영화의 세트장 같은 낡고 무시무시한 장소로 변신한다. 재개발 지역은 마을인데 마을이 아닌, 없어져야 할 마을인데 없어지지 않은 마을이다. 마치 불면처럼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다. 밤에 지나가다 새로 짓는 아파트를 보고 있으면 이 아파트가 흉가인지 혹은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다. 마치 소리를 뺀 웃는 사진과 우는 사진을 구별할 수 없듯 말이다. ‘사라진 마을가정동 비가’는 유령이 보고 있는지, 혹은 보고 있는 것이 유령인지 모호하다. 다만, 우리를 슬프게 혹은 섬뜩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환상적인 것 때문이란 사실만을 알 수 있다.
환상적인 것은 아름답지만 죽음을 안고 있다. 모르시 블량쇼가 『미래의 책』에서 말한 세이렌들의 노래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인어의 노래인 것이다. 인어는 아름답지만 사이렌이란 경고(죽음)의 의미도 담고 있다. 그렇다면 환상적인 것이 깊어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죽음이라는, 심연이라는 얼굴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깊이란 죽음을 체험할 때 비로소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죽음은 유혹의 형태로 온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부드러움은 약함도 너그러움도 아닌, 깊이를 통해서 획득된다. 그런데 그 깊이란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불면), 마치 국민인 것도 아니고 국민이 아닌 것도 아닌, 즉 유령(프롤레타리아)일 때, 공백일 때 그 깊이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드러움은 평범한 민중의 삶을 의미한다.
부드러움은 ‘흐리고 불안한 저녁-운유당 서신’에 나오는 “겸손해지는 시간”을 갖고 있다. 언제라도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의 모체”와 “결사의 실천을 경주하는 인간”(‘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마치 부드러운 채찍이 들고 일어설 때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부드러움은 강함을 추구하지 않지만 한순간 강해질 수 있다. 그것은 근육이 딱딱하고 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온화한 것이 한 순간 힘을 발휘하는 것이란 사실과 같다. 만일 근육이 딱딱하고 강하면 그것은 근육이 아니라 근육통일 뿐이다. 근육은 본래 부드럽다.
마지막으로 시 ‘동화(同化)’의 구절처럼, 독자들이 이 시집에 “그윽하고 자연스레 스며들어, 어느 날 문득 힘든 당신이 뒤를 돌아봤을 때, 익숙한 풍경처럼, 오랜 그림처럼 나 그곳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대의 손과 내 손이 만나 이루는 수줍은 호선처럼, 그렇게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스며들 수 있다면, 스며들어 끝내는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치 장자가 말한 백정의 칼처럼, 이 시집에 있는 뼈와 살을 가르는, 멋진 문장의 도를 독자들이 맛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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