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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리뷰]한 존재의 역사이자 삶의 흔적, 결 본문

리뷰

[리뷰]한 존재의 역사이자 삶의 흔적, 결

달빛사랑 2018. 5. 6. 02:57

한 존재의 역사이자 삶의 흔적,

-김건환 작가의 사진 작업에 대하여

 

 

, 그것은 한 존재의 역사이자 삶의 흔적이다. 모든 존재들은 결로서 자신의 삶과 이력(履歷)을 웅변하며 결을 통해 다른 존재와 자신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결은 내적인 응집과 외적 발산의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사물의 결, 특히 나무의 그것은 그것을 잘라봐야만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때 드러난 결을 통해 비로소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 이외의 존재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에 존재하는 외적 존재와의 소통 매개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것인가. 그러나 존재 간의 교감은 그러한 역설 너머에 오롯이 자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오랜 세월 전국의 소금창고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삶, 혹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나무들의 결을 포착하기 위해 미명(未明)의 어둠 속에서 숨을 죽여 왔다. 염부들이 미처 창고에 도착하기 전 창고 밖에서는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가끔 일찍 둥지를 나선 새들의 날갯짓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는 그 묵시적 시간 속에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나는 나무들의 뒤척임과 한숨과 기지개 소리를 듣곤 했다. 희미한 자연광이 창고 속까지 틈입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내 카메라렌즈가 나무들의 이력을 포착하기까지 숨죽이는 시간 동안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나무, 그리고 그것이 지닌 결들은 바로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는 것을. 인간의 삶이든 자연의 삶이든 기다림은 언제나 각각의 삶속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나는 나무의 삶을 앵글 속에 담으면서 동시에 내 삶 또한 렌즈 속으로 불러내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존재의 겉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나무의 결과 만나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나무가 하나의 목재로서 소용되기 위해 종횡(縱橫)으로 잘렸을 때, 우리는 나무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잘린 채로 나무는 소금창고 속에서 극한의 짠내를 삼켰다 뱉었다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신산(辛酸) 혹은 존재로서의 이력을 결로서 드러낸다. 극한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보통의 나무들보다 소금창고의 나무들은 수명이 길다고 한다. 그 신산한 시간을 견디는 동안 나무들은 옹이를 만들거나 자신의 삶을 응축한 결들을 만들어 내면서 나름의 전기(傳記)들을 스스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신안의 지도(智島) 혹은 증도에서 만난 나무들은 나이가 나와 비슷한 것들도 더러 있었다. 대체로 30여 년이 넘은 나무들이 마치 피가 다 빠져나간 미라들처럼 하나하나 그려 보이는 이력들이 어떤 때는 무서웠다가 또 어떤 때는 숭고하고 끝내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물론 빛이 들어올 때와 들어오지 않을 때 모두 사진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12일 걸리는 고된 작업이었고 그래봐야 고작 사진 10장 조금 넘게 건지는 그 시간들이 고통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든 자연의 삶이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특히 나무의 삶과 대면하고자 하는 이 작업에 있어서는 기다림이 하나의 작업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따라서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작업은 무척이나 무모하고 고생스럽게 느껴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나무의 숨결을 공감각적으로 만나려는 나의 시도를 당분간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 다시 말해서 내 사진철학이 핍진하게 반영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각각의 나무들이 옹이와 결로 풀어낸 수많은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복기(復記)하느라 격한 가슴을 억누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마침내 프린터로 출력하여 다시 내 눈 앞에 펼쳐놓고 그것들을 보았을 때, 그것들은 단순히 죽은 사물로서의 피사체가 아니라 내 삶속으로 자신의 역사를 안고 성큼 들어온 살아있는 존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신비한 경험을 지금 나의 글과 사진을 보고 있을 당신도 경험해 보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나는 다만 당신에게 그 극적인 이력의 주인공들을 소개할 뿐이다. 각각의 나무들이 펼쳐 보이는 다양한 결들에 담긴, 때로 은밀하고 때로 애틋하고 또 때로 장엄한 사연들을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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