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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청탁원고를 너무 일찍 써 보냈더니 신문사 주필이 문자를 보냈다. "마감은 다음 주인데요"라는 글 뒤에 웃음을 뜻하는 이모티콘이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뭘 쓸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는 글감이 떠올랐을 때 전광석화처럼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생각이 달아나서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나도 문장 뒤에 웃음 이모티콘을 첨부했다. 늘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필자들에게 글을 독촉해야 하는 신문사 입장에서는 나처럼 알아서 마감을 지켜주는 필자가 무척 고마울 것이다. 내가 특별히 성실해서 마감을 잘 지키는 건 아니다. 나의 글 쓰기 스타일과 마감에 관한 강박 같은, 이를테면 내가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이러저러한 한계가 마감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게 타인에게는 성실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점심에는 후배 장..

비질란테(Vigilante)를 양산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자경단원, 사적인 제재를 가하는 사람이란 뜻인 비질란테(Vigilante)는 제도 안의 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범죄와 범죄자를 제도 밖의 방식으로 응징, 해결하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때에 따라 의적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적 응징은 현행법상 명백한 불법인 데다가 이러한 행위를 용인할 경우, 자칫 범죄집단의 보복 범죄조차도 합리화할 수 있고,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로운’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그런데도 이러한 사적 응징과 해결 행위를 많은 사람이 지지하고 심지어는 심리적 공범이 되어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바로 평범한 국민의 시각에서 볼 때, 제도 안의 법이 범죄자의 권리는 과도하게 인정하고 피해자..

사실 나는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집이 없던 시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평생 집이 없었던 건 아니고 유년기에서 대학 2학년까지는 집이 있었고, 아버지가 사업이 망한 후인 대학 3학년 때부터 결혼한 30까지는 집이 없다가 31살에 비로소 집을 샀다.❚노동운동 하던 내가 집을 살 수 있었던 건, 역시 노동운동 하다 구속됐던 아내가 출소하고 몇 달 후 임신해서 뭔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운동권 출신에게는 취직할 만한 곳이 마땅히 없었다. 그런데 마침 운 좋게도 대학입시에서 논술 시험을 보기 시작하면서 각급 입시 학원에서도 논술 강의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나 역시 아는 선배 학원의 논술과 국어 강사로 취업하면서 본격적으로 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내 ..

어제 퇴근 무렵 전화한 우 모 선배는 “오늘이 6월 항쟁 기념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어?” 했다. 술꾼들이 술 마시기 위해 댈 수 있는 핑계는 백만 가지다. 사실 격조했다. 서로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다. 자꾸 말을 빙빙 돌리기에 “막걸리나 한잔해요. 구월동으로 넘어와요” 하고 약속을 잡았다. 핑계 김에 본 지 오래된 상훈에게도 연락했다. 직장에서(한겨레신문 계열의 잡지 ‘Economy 21’) 퇴근 중이었다. 훈이 ‘주점 갈매기의 꿈’에는 절대 안 가서, 어쩔 수 없이 옛 ‘경희네’ 근처 막걸릿집에서 1차 하고, 2차도 인천집에서 했다. 심지어 1차 하던 술집에서는 열린 창문을 통해 슈퍼에 가던 종우 형과 눈이 마주쳐, 형이 잠깐 들어와 막걸리 한잔 마시다 가기도 했고, 2차를 위해 인천집으..

얼굴을 마주하며 낯익은, 그러나 마뜩잖은 인사를 주고받은 오늘 같은, 이런 새벽은 익숙하다. 어제와 오늘이 겹친 뫼비우스의 시간을 벗어났을 때, 새벽은 물었다. “무엇 때문에 뒤척이는가?” 질문이 얄미웠다. 새벽은 내 불면의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창밖이 환해질 때까지, 휘고 늘어진 시간을 새벽이 장판처럼 돌돌 감으며 노는 걸 끝까지 지켜봤다. 창밖이 환해졌을 때, 비로소 포장이 뜯긴 선물상자 같은 잠이 잠깐 나를 찾아왔다. 80분 지각했다. 생각보다 피곤하진 않다. 무덤덤하다. 익숙함 때문이겠지. 오늘은 6월 민주항쟁 37주년 기념일.

아침나절 거실 소파 앞에서 바퀴로 보이는 죽은 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어딘가에서 약을 먹고 우리 집에서 죽은 것이겠지. 이미 저항도 도망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나는 휴지로 그것을 집어 들며 진저리 쳤다. 죽어서까지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심지어 깨어(살아) 있는 상태에서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었지. 결국 가족들에게 목숨을 잃고……. 벌레가 되어 비로소 노예와 같은 현실에서 벗어난 그는 행복했을까? 하지만 결국 벌레가 되었기에 그의 누이동생에게 최후를 맞게 되는 거니, 극도의 비극성이라고 해야 하나. 하필 저 벌레는 왜 우리 집에 와서 널브러진 걸까.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있을 때 ‘쏴~!’ 하는 빗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여름비. 아침에 만난 여름비는 여느 때의 그것보다 훨씬 정겹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난 아침 비였다. 그런 까닭에 오전부터 내내 마음이 두근거렸다. 점심때쯤에는 혁재나 자운 누나에게 연락해 함께 점심 먹자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혁재가 만석동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만약 어제 과음했다면 오전은 내내 잠을 하기 때문이다. 대신 은준에게 전화해 백령면옥에서 빈대떡과 수육, 물냉면을 안주로 낮술 하자고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역시 그만두었다. 비와 술을 연결하는 건 오래된 나쁜 버릇이다. 그러던 차에 또 부고 문자가 도착했다. 이동렬 선배의 장모상이었다. 빈소는 멀지 않았으나 조의금만 보내고 빈소는 가지 않았다. 형의 모교..

발송한 결과물(의뢰받은 수필집)에 관한 의뢰인의 피드백이 없다. 필연적으로 진행될 일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피드백이 없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다. 결과물이 만족스럽거나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 꼼꼼한 의뢰인의 성격상 보낸 지 사나흘이 지나도록 안 보았을 리는 만무하고, 보았지만 특별히 문제 될 게 없어서 연락하지 않았거나 시간이 없어서 연락 못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자신이 작성한 글을 자연스럽게 윤문한 것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을 거라 짐작된다. 이제 출판사와 의뢰인이 상의해 첨부할 사진을 고르고, 지질을 선택하고, 발행 부수를 정한 후 완성된 원고를 PDF로 만들면 다시 나에게 검토 요청이 들어올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에는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다. 총량 뒤에 법칙이란 단어를 붙여 무게감도 더했다. 가장 자주 언급되는 건 술과 섹스의 총량의 법칙이다. 한 사람이 일생 먹을 수 있는 술의 양과 섹스의 횟수는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총량을 적절하게 안배하면 젊을 때나 늙을 때나 비슷한 횟수로 술 마시거나 섹스를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즉, 젊었을 때 과도하게 술 마셔 이미 총량에 근접했다면) 늙어서는 무기력하게 지내거나 현저하게 횟수가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 사람은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체력적인 이유로 술 마시고 싶어도 먹을 수 없게 되고, 섹스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인데, 굳이 총량의 법칙 운운..

주중에 현충일이 끼어 있어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출근하지 않는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없어서 무척 홀가분하게 닷새를 쉴 수 있다. 시간은 나를 배려한 적도 없고 일말의 온정도 없기 때문에 닷새가 다섯 시간처럼 빠르게 지나갈 수도 있다. 그저 텔레비전이나 무기력하게 들여다보거나 사람 만나 술 마시고, 운동하고 낮잠 자고 인터넷 하면서 아무 보람 없이 닷새를 허비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다. 운동하고 낮잠 자고 사람 만나는 일을 무조건 보람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책을 보거나 글을 써야만 보람 있고 의미 있게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강박이다. 하루를 소일하는 방식만으로 의미와 무의미를 가를 수는 없다. 본인의 마음에 성취감과 만족감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핵심이다. 정직한 인간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