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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공기가 안 좋아 문을 열 수 없는 날, 덥고 습해서 아점 먹고 사무실에 나왔다. 오늘 비서실은 여비서 2명 남기고 모두 출장 갔다. 컴퓨터를 켰더니 월요일까지 제출해야 할 재계약 문서가 내부망으로 도착해 있었다. 부랴부랴 중등교육과 문화예술 교육 담당 장학사와 교육문화회관 팀장에게 관련 자료를 부탁하고 서둘러 서류를 정리했다. 내일은 가족 모임이 있어서 못 나올 듯싶어 오늘 오후에 출근한 건데, 나오길 잘했다. 안 나왔으면 빠듯한 일정에 숨 가쁠 뻔했다.

어제 퇴근하면서 혁재에게 들렀다. 비 내리는 만석부두, 도착했을 때 미경이 먼저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사실 혁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갈 때 그녀의 문자를 받았다. “오늘 막걸리 한잔하실래요?”나는 짧게 대답했다.“혁재 만나러 가는 중”그러자 그녀는 “아, 네네” 하고 답장을 보내왔다. 대답을 반복하는 건 그녀의 버릇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당연히 그녀가 구월동에 있거나 신포동 출판사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혁재의 작업실에서 천연덕스레 밥을 먹고 있었던 거다. 반가우면서도 깜짝 놀랐다. 아마도 미경은 내가 만석부두로 가는 걸 모르고 문자를 보냈다가, 내가 혁재에게 간다고 하자 자신도 신포동 출판사에 있다가 들렀을 것이다. 신포동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이곳은 그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아..

잠에서 깼을 때 비는 이미 내리고 있었다. 많은 꿈을 꾸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를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는 어렴풋한 느낌은 든다. 그 하소연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고, 그런데도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아 무척 답답함을 느끼다 잠에서 깼다. 아마도 답답해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없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혈당을 쟀더니 112, 정상 수치(100)보다 12가 높은 공복혈당장애에 해당하는 수치다. 다만 엊저녁에 채소를 곁들이긴 했지만, 곱빼기 분량의 냉국수를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혈당 수치가 높을 거라 예상은 했다.❚사실 요 며칠 혈당 수치가 높았다. 당뇨 판정에 해당하는 12..

7월에는 정말 행복해질 거다. 나의 그녀도 7월이면 일을 그만두고 나를 만나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고, 누나들과 동생을 만나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눌 예정이고, 오랜만에 아들에게도 연락해 볼 생각이다. 7월은 일 년의 반을 새롭게 시작하는 달. 반년 사이 새롭게 변한 것도 있고, 지긋지긋한데 떼어내질 못해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사는 것도 많았다. 7월에는 지긋지긋한 것도 내 삶의 일부라고 다독거리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이 웃고 더러 울고 기억할 건 기억하고 잊을 건 잊으면서 온통 사랑일 7월을 건너야지. 사놓은 복권도 당첨됐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당첨의 행운이 자주 있었으니까. 여유가 생기면 그 여유를 나눌 사람들이 나에게는 많다. 또 착한 일, 좋은 일에 쓰기도 하겠지만 친구들과 말년을 재미있게 ..

오전에는 잠시 날이 개었다. 새벽까지 많은 비가 내려서인지 적어도 아침나절에는 바람도 솔솔 부는 게 더위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테라스에 나가 하늘을 보고, 부리나케 장바구니 챙겨서 채소 가게 들렀다. 한여름이라서 그런지 가격은 좋았다. 장마가 끝나면 다시 채솟값이 오르려나. 하지만 채소들이 더위 먹은 듯 시들어 보였다. 그래서 가격이 쌌던 모양이다. 복지몰에서 김치도 주문했는데 두 달 전보다 가격이 내렸다. 배춧값이 그만큼 떨어졌기 때문이겠지. 싱싱하지 않은데도 이 채소 가게에는 늘 사람이 붐빈다. 오이 8개, 버섯, 고추 2 봉지, 청경채 2 바구니, 부추, 숙주, 깻잎, 마늘 등을 샀고, 돌아오는 길에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다듬었다. 정오 무렵에는 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수요일에 오픈한 집 ..

내 오랜 버릇 중 하나가 일기를 몰아 쓰는 것이다. 물론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부터 나는 기록하기를 좋아했고 떠오르는 상념을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다. 여학생처럼 대동문구에 들러 종이 질이 좋고 디자인이 예쁜 일기장을 고르는 게 나에게는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기 쓰기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일처럼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는 시간이었으며, 때때로 사춘기적 질풍노도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소중한 계기였다. 하루라도 일기를 쓰지 않으면 양치를 하지 않은 것처럼 찝찝했다. 이런 내가 일기를 몰아 쓰는 습관이 생긴 건 대학 졸업 후,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에는 경찰의 압수수색과 불심검문이 흔할 때여서 활동가들은 기록이나 사진..

친하게 지내던 비서실 김 사무관이 남부지원청 과장으로 승진 발령 났다. 비서실 식구들과 송별 오찬 하기로 해서 비번이었지만 느지막이 사무실에 나왔다. 오찬 장소는 교육청 후문 ‘설화 갈비’, 나는 비서를 통해 미리 주문한 한우비빔밥을 먹었다. 가격(15,000원)에 비해 맛과 질은 별로였다. 보운 형은 어제 술 마셨다며 해장국을 먹었는데, 그게 훨씬 맛있어 보였다. 남이 떡이 커 보이는 건 만고의 진리다. 오늘 오찬에는 시의회에 참석했던 감(監)님도 함께했다. 요즘 맨발 걷기 운동을 통해 체중 감량 중인데, 앞으로 2kg만 더 줄이면 90kg이 된다며 활짝 웃었다. 그럼 감량 전에는 얼마나 나갔다는 거지? 아무튼 말을 듣고 보니 턱선이 다소 살아난 것도 같았다. 점심 먹고 돌아와 비서가 가져다준 참외와..

만수동 자가 제면 식당 ‘모밀지기’ 본점이 우리 집 앞으로 이전했다. 집 앞 메밀 냉면집과 집 오른쪽, 짜장 맛집으로 소문난 중국집 ‘전가복’, 그리고 얼마 전에 문을 연 1분 거리 만수역 앞의 ‘한신우동’까지, 면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흐뭇한 트라이앵글이 아닐 수 없다. 평양냉면집도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집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만수 3지구 ‘황해냉면’이 있으니 만족하기로 한다. 모밀지기의 모든 면(냉면, 온면, 판)은 6천 원, 요즘 이만한 가성비는 찾기 힘들다. 다만 점심시간에는 대기 번호 받고 한참(길게는 30분 이상)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 오늘이 누나의 생일인 줄 알고 (일정을 알려주는 ‘구글 캘린더’에 그렇게 표시되어 있었다) 새로 생긴 식당 탐방 겸 해서 누나들을 불러 ..

인천시민사회단체연대가 재정사업의 일환으로 백운역 근처 주점 ‘공존’에서 후원주점을 열었다. 늘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재정확보 방식은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라서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대체로 주점에 오는 손님들이 해당 연대의 소속 단체 회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쪽 동료의 돈으로 저쪽 동료의 급한 불을 끄는 식이어서 연대 차원의 전체 파이는 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방식의 재정사업을 하는 이유는 일단 표를 떠넘긴 후 나중에 회수하는 방식이므로 모금이 쉽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또 단체 소속 동지들은 정리(情理)가 있어 동지의 일에 쉽게 지갑을 연다. 안이한 발상이긴 하지만 이처럼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쏠쏠해서 많은 단체가 일일주점을 통한 모금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시민연대는 ..

잠을 설쳐서 피곤한 상태로 출근했다. 오늘은 약속이 많은 날이었다. 일단 화가 JS의 요청을 받고 그가 곧 출간할 예정인 그림책의 텍스트를 검토해 주러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그의 집을 방문했다. 계산역 5번 출구로 나오면 3분 거리에 있다는 말과 달리 빠른 걸음으로 걸었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렸다. 알량한 그늘이라도 보이면 바로 그 그늘 위에 몸을 포개고 걸었다. 둘 다 식사 전이어서 일단 식사부터 하기로 하고 집 근처 ‘백암순대’에 들러 순댓국을 먹었다. 국물이 깊었다. 가격은 구월동보다 비싼 10,000이었다. 그의 집은 생각보다 넓고 깨끗했다. 100인치 대형 텔레비전이 거실 벽에 걸려있고, 양옆으로 JBL 스피커와 고급 앰프가 놓여 있었다. 큰방에는 한눈에 봐도 고가인 오디오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