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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가끔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판단을 내릴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오늘 같은 즉흥적인 만남 같은 것.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감기가 밉광스러워서 술을 진탕 먹고 죽은 듯 잠을 자서 떨쳐보려고 작정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후 꾸벅꾸벅 졸다가 오후 2시쯤 은준에게 전화해 "냉면 먹으면서 낮술 한잔할까?" 했더니, 은준은 잠시 망설이다 "지금 빨래 돌리고 있어요. 3시 30분에 냉면집에서 보지요" 했다. 전화를 끊고 의자에 기대서 '깜빡 잠'을 잤다. 3시쯤 일어나 세수하고 외출준비를 했다. 냉면집까지는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으나 날이 너무 뜨거워 버스를 탔다. 냉면집에 도착했을 때, 은준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맛집답게 손님들이 많았다. 수육과 빈대떡, 소주를 시..

주말, 나의 지인들은 페북을 비롯한 각종 SNS 속에서 모두가 분주했다. 끼리끼리 모여 술 마시거나 고기를 굽고, 술잔을 부딪치며 환하게 웃는 사진들이 속속 올라왔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척추 장애 시인 명수와 시각 장애 시인 병걸이가 은준이와 함께 고기를 굽거나 잔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사진은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짠했다. 날이 궂거나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시각장애인인 병걸이의 하루를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정작 그는 유쾌하고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데 괜스레 내 쪽에서 지레 연민하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면 다시 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심지어는 '네 코가 석 자잖아. 그런 네가..

오전에 장을 본 거 말고는 종일 집에 있었다. 감기몸살은 누그러진 듯싶었다. 간간이 기침은 나왔으나 참을 만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어 종일 에어컨을 틀어놓고 생활했다. 몸살이 내게서 쉬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분명 나쁜 공기와 에어컨 때문일 것이다. 알면서도 에어컨을 켤 수밖에 없는 게 더위를 많이 타는 나의 불행이다. 머리로는 환경을 걱정하면서도 몸으로는 그 환경을 지속해서 파괴하는, 모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계절, 그래서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은 자주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진안에 사는 영택 희순 커플이 인천에 왔다며 전화했다. 민예총에 볼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컨디션이 좋진 않았지만 만나자고 했더니, 창길 커플과 버텀라인 공연을 예약했다기에 다음으로 ..

새벽녘에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와 잠이 깼다. TV 모니터에서는 유튜브 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화면 속에서는 축구선수 이영표가 뭔가에 대해 단호한 자기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자동으로 설정해 놓은 에어컨은 미지근한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리모컨을 눌러 온도를 1도 낮췄다. 잠결에도 내가 내는 신음(呻吟)이 들렸다. 오른쪽, 왼쪽 뒤척일 때마다 끙끙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눈꺼풀 위에 앉은 새벽잠을 미약하게나마 몰아냈다. 목은 아프고 기침은 나오는데 가래는 나올 듯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았다. 기침을 깊게 해서 가래를 떼어낼 생각으로 나오는 기침을 일부러 모았다. 눈을 감은 채 일어나서 냉장고로 가 판피린 한 병을 또 먹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로 간지러운 목을 축였다. 창밖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지..

오래간만에 볕을 봤다. 지난주부터 내내 비가 오지 않아도 날은 흐렸는데, 오늘은 모처럼 쨍한 여름 볕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매트와 커버, 이불과 베개를 테라스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오랜만에 눈부셨다. 운동하고 점심 먹고 청사에 출근했다. 오늘은 쉬려고 했는데, 점심때가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높아지는 걸 보고 시원한 사무실에 나가기로 맘먹었다. 내일 점심은 수필집을 의뢰한 권 선생과 함께하기로 했는데, 점심 먹고 나서도 얼마 간은 그분과 시간을 보내야 할 듯하다. 그분은 어젯밤 늦게 카톡으로 책을 발간하는 소회를 장황하게 써 보내며 내 생각을 듣고자 했는데, 냈는데, 사실 좀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에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책을 내든..

생활이 다소 풀어졌었다. 무엇보다 음주가 잦아졌고 당분과 탄수화물 섭취량이 많아졌다. 둘 다 건강에 치명적이지만, 음주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안 좋다. 대체로 주당들이 내세우는 음주의 명분은 친목 도모나 스트레스 해소인데, 친목은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는 결코 음주로 해소될 수 없다는 걸 음주할 때마다 뼈저리게 깨닫는다. 아이러니다. 술의 부작용을 술 마시며 깨닫다니, 하긴 경험해 보지 않고 생각으로만 알 수는 없을 테니. 늘 말하지만 ‘순간의 유혹’만 잘 참아내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거다. 그리고 나만 잘하면 뭐 하나, 주변에서 도와주질 않는 것을. 나중에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친구나 지인들이 오랜만에 연락해 술 마시자고 하는 걸 거절하질 못하겠다. 그러니 산속에 들어..

월요일은 비번이었으나 재계약 관련 서류를 제출해야 해서 오전에 출근했다. 사실 내일 제출해도 상관없었지만, 보운 형이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형을 도와주러 '일부러' 출근했다. 다음 달이면 교육청에서 일한 지 만 4년이다. 면접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400일이 더 지난 것이다. 그 4년 동안 나에게는 무척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내가 그 사이에 고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청에 들어가던 그 해에는 엄마가 생존해 계셨다. 청에 들어갔을 때, 문밖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내가 교육청에 들어간 지 4개월 만에 엄마는 나만 이곳에 남겨둔 채 하늘나라로 가셨다. 엄마를 잃은 것은 한없이 슬픈 일이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

목포에서 후배 은희가 상경했다. 때맞춰 그의 멘토인 동화마을 최 모 선배가 나와 사진작가 기성, 시인인 성필 씨와 병걸이, 은준, 현정, 다비다, 퇴직 교장 한 선생 등을 초대했다. 나는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모임 장소인 옥상에 닿자마자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와서 옥상 평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은 내리는 빗물에 어쩔 줄 몰라했다. 결국 모두 방 안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준비한 음식들을 먹었다. 닭백숙과 비빔밥, 기성이가 사 온 삼겹살과 직접 담근 막걸리, 포도주, 맥주, 소주 등이 상 위에 그득했다. 최 선배는 매번 사람들을 초대해 이렇듯 대접한다. 모임을 파할 무렵 최 선배가 “다음에 오시면 새로운 메뉴로 대접할게요”라고 말하자, 내 친구 기성이 “누이, 이것도 다 돈이에..

목하,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교란과 각종 재해가 일부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고 있다. 사막에는 눈이 내리고, 재앙 수준의 폭우와 태풍, 찜통더위가 반복되고 있으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대부분의 인류학자와 환경주의자들은 이제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고 탄식하며, 그 재앙의 일차적 원인은 인간에 있다고 강변한다. 인간은 당장의 편리를 위해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무성했던 삼림을 훼손하여 황무지로 만들었다. 그렇게 산과 들을 죽인 인간은 온갖 쓰레기와 플라스틱을 바다에 유기해 해양을 죽였다. 공산품을 만들기 위해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그 부산물은 독가스가 되어 다시 인간의 폐 속으로 흡입되고 있다. 하늘도 땅도, 강도 바다도, 심..

큰누나 내외, 작은누나, 동생 내외와 작은 조카 등과 점심 먹었다. 누나들과는 최근에 자주 식사했으나 동생 부부와는 오랜만이다. 오늘 모임도 동생이 주선했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작은 조카 우진이는 얼마 전 텀블벅(후원금 모금)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사촌 형인 아들 수현이가 꽤 큰 액수를 후원했던 모양이다. 기특했다. 형제가 없는 수현이가 앞으로도 사촌 동생들과 친형제처럼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식사 후 매형은 근무를 위해 회사로 돌아갔고 남은 사람들은 근처 카페에 들어가 담소를 나눴다. 늘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4남매는 여러 면에서 참 많이 다르다. 그 ‘다름’으로 인해 살면서 몇 차례의 오해가 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성정들이 온화한 편이라서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고 오늘까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