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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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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비가 왔고, 날은 봄날처럼 따스했으며 큰누나는 아들 집에 다녀온 후 빚을 준 사람처럼 나와 작은누나에게 밥 먹자고 연락했다. 누나가 만나자고 한 식당은 오늘 쉬는 날이어서 오랜만에 3지구 살던 시절 엄마와 자주 가던 ‘녹각 삼계탕’ 집에 들러 삼계탕을 먹었다. 여전히 맛있었다. 하지만 점심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나까지 두 테이블이었다. 오늘 밥 먹다 문득 바라본 큰누나의 얼굴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요즘에는 거실에서도 잘 자고, 영양 섭취를 위해서 두부와 달걀도 열심히 먹는다고 했다. 마치 칭찬을 염두에 두고 착한 일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누나는 그간의 일상을 죽 풀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작은누나는 “좋아, 잘됐어”라든가 “그래, 진작 그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아”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우리와 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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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첫날, 아끼는 시인이자 평론가인 후배 이병국의 새 평론집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내게 왔습니다. 그곳이 어디든 (강의실이든 소모임이든 단체든 집회 현장이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마다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하고 있는 그는 내가 아는 한 놀랄 만큼 부지런하고 치열하며, 심지어 유쾌하기도 한 시인이고 평론가입니다. 각설! 어제 그의 책을 만났을 때 일단 제목이 맘에 와닿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건 향후 전개될 그의 문학적 지향을 함축하는 표현이자 앞으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온갖 유혹과 반문학적 현실에 대한 굳센 (응전의) 다짐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가 역사와 인간, 문학과 현실, ‘우리’라는 벗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나(우리) 역시 문학의 벗이자 문화 운동의 동료인 그를 절대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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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모임과 행사가 하루에 치러지다 보니 술자리 빼고는 '행사의 주인공들'에게 얼굴 도장 찍고 오기에 급급한 하루였다. 그러다 보니 방문했다는 뿌듯함보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은 거 아니야' 하는 자괴감이 때때로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행사 주인공이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하며 환하게 웃고 악수를 건네올 때는 '그래, 오길 잘했어' 하고 안도한다. 행사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의무감에서 비롯한) 형식적인 방문이라도 안 온 것보다는 온 게 백 번 낫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오늘 참석한 작가회의 모임도 그렇고 오랜만에 개인전을 개최한 서은미 작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서은미 작가는 그동안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그것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천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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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선배이자 문학회 선배인 준호 형이 인천에 왔다. 대학 시절에도 다른 선배보다 유독 준호 형과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 알게 된 일이지만, 모든 후배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건 아마도 준호 형이 선배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후배들을 진정성 있게 대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문학회 회원이었지만 활동 당시 시나 소설을 쓰진 않았고, 졸업 후에는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얼마 전 정년퇴임을 했다. 그리고 졸업 이후 서로 연락이 끊어졌던 회원들을 결속시킨 것도 형이었다. 그는 직접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회원들을 초대했고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한 30여 명의 회원들이 지금도 그 채팅방을 통해 경조사 소식과 평상시의 안부를 나누고 있다. 인천지하철 1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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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비록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어젯밤 늦게까지 맹렬하던 눈발이 오늘 아침까지 이어질 줄 몰랐다. 담장에 쌓인 눈은 얼핏 봐도 20센티는 넘어 보였다. 계단에 눈 쌓였을 걱정되어 나가 봤더니 다행히 한쪽에만 쌓인 채 녹아가고 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본격적으로 눈 치우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눈은 물을 먹고 있어 무척 무거웠다. 워낙 많은 눈이 내린 데다가 물까지 먹고 있어 넉가래로 밀 때는 힘이 들었다. 계단은 작은 청소용 부삽으로 눈을 치웠고 정원의 눈과 대문 앞의 눈은 넉가래로 밀었다. 방한용 누비바지와 오리털 파카를 입고 얼추 40분가량 눈을 치웠더니 속에 땀이 났다. 눈을 치우는 동안에도 가루눈이 펄펄 내렸지만, 바닥에 쌓이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오늘 아침 날씨가 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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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내린 눈은 종일 그치지 않고 늦은 밤까지 계속해서 내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 쌓인 눈을 보면서도 오늘 하루 이렇듯 많은 눈이 내릴 줄은 몰랐다. 눈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늘 새벽 다른 때보다 일찍 깼다. 가습기를 켜놓고 잤기 때문인지 호흡이 가빴다. 천식 발견 초기에 경험한 답답함이었다. 한동안 쓰지 않던 기관지 확장제를 찾아 흡입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였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발이 제법 거셌다. 잠이 달아나 책상 앞에 앉아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가습기의 분무량이 너무 많아 방안의 습도가 너무 높으면 천식 환자들은 호흡 곤란이나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호흡이 힘들었던 게 실제로 가습기 때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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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비서실장과 난정평화교육원 김 원장,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시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온 임 교육장, 그리고 나와 보운 형, 이렇게 다섯 명이 함께 식사했다. 양평해장국 먹으로 식당에 들어가자 박 실장은 "야, 여기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와 보네요" 하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그가 청에 근무할 때 보운 형, 나와 더불어 자주 들렀던 곳이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두 사람은 현직에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박 실장은 30년 이상 교육계에 몸담았던 탓인지 퇴임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도 한결같이 청과 교육감, 인천 교육에 관한 걱정뿐이다. 참 선한 사람이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어제 술 마신 탓인지 다른 날보다 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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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번이었지만, 출근했다. 어제 오후, 다인아트 윤 대표가 급하게 전화해 교육청에 납품할 (인천지역 직업계 고등학교를 탐방한) 책의 교정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윤 대표에게 필자가 기자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글쓰기의 기본은 하겠다 싶어 내심 안심했으나, (정말 대충 훑어보면 될 줄 알았다), 원고를 넘기다 보니, 웬걸, 수정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신문에 게재했던 기사 모음이라고 하던데, 그래서일까 신문에 게재됐던 원래 기사 원고와 후일에 첨가한 원고 간 편차가 무척 심했다. 전자(기사 원고)는 손 볼 게 별로 없었고, (학생, 학부모, 교사의 인터뷰를 모아 놓은) 후자는 종결어미도 일관되지 않았고, (해라체와 합쇼체가 섞여 있었고) 호응이 깨진 문장도 적지 않았다. 아마도 촉박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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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착한 블랙야크 등산화(22만 원, 이런 고가의 등산화는 처음 사 봤다)를 신고 시장 다녀왔다. 당연히 신고 갈 신발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새 등산화를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굽이 높고 신발 자체가 마치 갑옷처럼 단단한, 그래서 발을 안정적으로 잡아주는 등산화는 처음 신으면 무척 어색하다. 자기 보폭이나 걷는 습관을 신발에 각인시켜 줘야만 신기가 편해진다. 등산화를 신고 처음 집을 나섰을 때는 뭔가 어색했다. 발이 신발에 반응하는 느낌이 강렬했다. 단골 채소가게에 도착해 장을 보고 돌아올 때, 비로소 발과 신발이 조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나니 신발이 (정확히 말하면 신발 안의 발이) 너무 편했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었다. 돈 값을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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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전날 마신 막걸리 때문일 것이다. 어제 카페 '산'에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로미가 가져다준 하이볼을 한 잔 마신 이후, 줄곧 막거리만 마셨는데, 문제는 막걸리의 종류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는 것. 소성주는 기본이었고, 신미선 씨가 가져온 땅콩 막걸리, 혁재가 갈매기에서 가져온 해창막걸리와 송명섭막걸리, 연꽃 막걸리, 지평막걸리 등 하도 다양한 막걸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는데, 그 모든 종류의 막걸리를 섞어 마셨으니 오늘 아침 머리가 안 아팠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술 마신 다음날이 불안한 이유는 평소의 루틴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장을 해야 한다는 미명 하에 의지 박약자처럼 라면과 냉면을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