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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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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다. 사악하면서도 멍청한 통(統)만 아니라면 정말 한 없이 늘어져도 별로 세상에 미안하지 않은, 그렇게 평화로운 휴일이었다. 오전에는 채소 가게에 들러보려다가 날이 생각보다 추워 다음에 가기로 했다. 종일 보일러 제어기의 빨간 불빛(보일러 가동 중 불빛)이 꺼질 줄을 몰랐다. 22도로 되어있는 실내온도를 1도만 내릴까도 생각했는데, '1~2만 원 더 내고 따뜻하게 살지 뭐. 내가 다른 호사를 누리는 것도 아니잖아'라는, 지극히 반환경주의적인 생각을 하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후배들은 어제 공연을 잘 끝낸 건지 어쩐 건지 알 수 없지만,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가끔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다행히 가슴에 꽉 들어찼던 그 그리움은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시나브로 빠져나갔다. 그리운데도 만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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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집에서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시청했다. 가끔 책을 뒤적거렸으나 오래 붙잡고 있지는 못했다.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떨어지다 말다 했다. 저녁에는 혁재와 산이의 공연이 있어 들러볼까 했는데, 그만두었다. 메인이 아니라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날이 추웠다. 그리고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아마도 또 술을 마셔야 했겠지. 연이은 음주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물론 어제는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오늘 메일로 도착한 건강 검진 결과 통지문에 당뇨가 의심된다는 항목이 있어 기분이 우울했다. 어머니도 생전 당뇨약을 복용했고, 동생도 이미 당뇨약을 먹고 있는 터라 나 역시 분명 당뇨 진단의 순간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수치가 높게 나온 통지서를 보고 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직 담당의사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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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시인 K와 L(평론가이자 시인)을 구월동에서 만났다. 오늘 만남은 경기도 남양주에 살고 있는 K가 이미 한 달 전부터 "형이 너무 보고 싶어요"라며 수차례 전화해 잡은 약속이었다. 원래는 경기도와 인천의 중간 지점인 서울 종로쯤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인데, K는 다시 전화해 "형, 내가 인천으로 갈게요" 해서 약속 장소를 구월동으로 바꿨다. 그리고 인천에 온 김에 인하대 대학원 동문이자 (그녀의 학부는 이화여대) 문우(文友)인 L도 함께 보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내가 L에게도 연락했다. 두 사람 모두 최근 문단에서 촉망받는 시인들이다. 물론 K는 나이가 중견 시인만큼이나 많지만 그동안 창작보다는 연구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불과 5년 전쯤에 뒤늦게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등단하자마자 각종 문학상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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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위해 옷방에 들어가서 옷을 고를 때, 고민했다. 내복을 입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입고 나왔다. 내복 착용감은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내복은 멋으로 입는 게 아니라 방한을 위해 입는 옷, 확실히 내복을 입으면 추위를 덜 느낀다. 입어 본 사람은 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다리가 사시나무가 되는 걸 막아준다는 것을. 그래서 추운 겨울, 내복의 효용을 느껴본 사람은 이듬해도 또 그 이듬해도 겨울이 되고 찬바람 불면 내복을 찾게 되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있게 먹듯 점심은 이번 교육청 정기 인사에서 (비서실에서) 만수고등학교로 발령 난 박연수 비서와 함께 먹었다. 그녀는 내가 출근하자마자 내 방으로 와서 만수고 발령 사실을 알려주었다. 엊그제 식당에서 만났을 때 이번 인사이동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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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무척 추워졌다. 환기를 위해 문을 열자 찬 겨울바람이 기회를 엿보던 침입자처럼 순식간에 방 안에 들어찼다. 밤새 가라앉았던 방 공기가 깜짝 놀라며 들어온 바람과 얼떨결에 섞였다. 상쾌했다. 2중 창문 중 안쪽 창에 성에가 되지 못한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으로 쓸어내리니 물이 주르르 아래로 흘렀다. 커튼을 건드리자 포르르 먼지가 날렸다.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커튼을 떼어내자, 커튼에 가려졌던 창문의 맨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책상과 책꽂이, 각종 모니터에 쌓인 먼지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날은 흐리지 않았다. 운동하기 위해 실내 자전거에 올라가 페달을 밟을 때 작은누나가 귤을 한 상자 들고 들어왔다. 점심은 채소와 과일만 먹었을 뿐 정제 탄수화물은 먹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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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만만한 날씨였다. 집에서 나오기 전 내복을 입을지 말지 잠깐 고민했다. 거리로 나왔을 때 ‘안 입고 나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철 안에서는 잠깐 등에 땀이 났다. 바람은 제법 불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선풍기를 틀어 땀을 식혔다. 그러나 오늘 회의 참석을 위해 청사를 방문한 전 비서실장 박과 함께 점심 먹으러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깜짝 놀랐다. 바짓단 아래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후드티와 경량 오리털 잠바를 입은 상체는 견딜 만했다. 문제는 아래였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같이 걷던 보운 형과 박 실장도 두꺼운 옷차림이었지만 몸을 웅크렸다. 내가 이를 부딪치며 “출근할 때보다 확실히 추워졌는데요” 했더니, 옆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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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 머릿속 같다. 그래도 얽히고설킨 저 전선의 피복 속에는 세상의 모든 등(燈)을 향해 빛을 나르는 분주하고 대견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걸 나는 믿는다. 종일 먹고 자고 했다. 해장을 겸한 브런치로 채소와 순두부를 넣은 라면을 먹었고, 일본 드라마 '미스터리라고 하지 말지어다'를 시청했으며 얕은 낮잠을 한 시간쯤 자다가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저녁에는 채소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양 조절을 못해서 배가 너무 불렀다. 양 조절은 늘 실패한다. 한 번도 부족하게 양을 조절해 본 적이 없다. 미필적 고의 같은, 이를테면 의도된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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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시장 다녀와서 빨래와 집안 청소를 했고, 오후에는 무료해서 죽을 지경인 은준의 전화를 받았다. 어제 있었던 탄핵을 주제로 한 30분 떠들다가 내 쪽에서 지레 지쳐서 "컨디션 괜찮으면 낮술 한잔하고 일찍 끝내자"라고 내가 먼저 술 얘기를 꺼냈고, 은준은 반색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고 나서 혁재에게도 전화했다. 혁재는 어제 갑자기 어머님의 컨디션이 나빠진 탓에 탄핵 촉구 집회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며 모친을 돌봤다. 어머님의 안부도 물을 겸해서 전화했더니 다행히 어머님은 혼자 식사도 할 만큼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나올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가능하다고 해서 혁재도 함께 만나기로 했다. 모래내 시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혁재는 모래내 시장을 신기시장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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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왕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은 가결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지난번과 같은 여당의 배신으로 다시 또 부결되면 어쩌나 내심 맘을 졸인 국민이 많았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국민의힘 의원 중 23명이 찬성하거나 무효표를 던져 4표 차이로 가결되었다. 탄핵 가결 순간 국회 앞에 모여 있던 수십만의 인파 속에서 함성이 터졌다. 또한 뉴스를 보니 현장에서는 아이돌그룹인 ‘소녀시대’의 히트곡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집회와 시위 문화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부조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뿌듯했다. 이제 남은 건 헌법재판소의 판단일 텐데, 현재 헌재 재판관 6명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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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길병원에 들러 폐암 진단을 위한 컴퓨터 단층촬영(CT)을 하고 왔다. 오래전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찍어 본 후 20년 만의 촬영이다. 건강보험 상 CT는 2~3차 의료기관에서만 가능해서 길병원으로 예약했다. 청에서도 가깝고 엄마 생전에 자주 드나들어 무척 익숙한 병원이다. 다만 큰 병원이다 보니 절차가 복잡하고 방문객이 많아 대기 시간이 길었다. 암센터 맞은편에 있는 국민검진센터에 들러 접수하고, 3층 진료실에 올라가 의사와 상담한 후,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향후 일정을 브리핑받은 후, 지하 1층으로 내려가 CT를 촬영하기까지 한 시간쯤 걸렸다. 정작 촬영은 1분이나 채 걸렸을까. 결과는 메일로 받기로 했고, 그것과는 별개로 담당 의사와 오늘 찍은 CT 영상과 관련하여 면담하기 위해 이번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