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시집을 읽다(토요일) 본문
사과가 어울리는 계절, 사과 향 가득한 시집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도 선배님의 준열한 시 정신에 존경심을 갖고 있사과가 어울리는 계절, 사과 향 가득한 시집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도 선배님의 준열한 시 정신에 존경심을 갖고 있기도 했고, 사람의 향기는 물론 변하는 계절의 향기조차 맡기 어려운 요즘 같은 현실에서 잘 익은 사과처럼 향기(즐겁고 밝고 환하기만 하지 않은, 다양한) 나는 선배님의 시를 읽은 것은 크나큰 행복이었습니다.
어린 열매를 탐스러운 과실(果實)로 만드는 것은 시간의 힘이자 그 시간 속에서 만나는 빛과 물과 공기와 바람 등 자연과 열매가 살뜰하게 교감(또 때로는 부딪침)을 나눈 결과일 겁니다. 열매는 평등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교감하면서도 홀로 도저한 고독 속에 들어 속살을 만들고 씨를 품고 즙을 만들며 어느덧 '사과'가 되고, 스스로 익어간 고독의 이력인 향기를 최후로 우리 앞에 발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 익은 한 알의 사과는 생명의 사투와 기쁨, 고독과 비애의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작은 하나의 우주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시집 제목인 ‘사과 얼마예요’는 치열한 삶의 무게 혹은 가치를 묻는, 자부심 가득한 질문일 수도 있고, 동시에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한 우주(생명)의 지평을 가늠하는 아득한 소망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때(시집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과에게 사과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은 얼마나 치열한지, 덜컥 겸손해지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인지, 내 삶(혹은 생명)의 충일함이 어째서 타인에게 시샘만이 아닌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자주 되묻고 더러 깨닫게 되는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번에 만난 선배님의 시집이 그랬습니다. 시집은 탐스럽게 익은 한 개의 사과였습니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러면서도 내 삶의 무게를 새삼 생각하게 한 고마운 사과…….
사과 얼마예요ㅣ조정인
사과는 사실 전적으로 서쪽입니다 사과 속에 화르르 넘어가는 석양, 석양에 물든 맛있는 책장들 산산이 부서지는 새 떼 산소통이 넘어지고 쏟아지는 바람 호루라기 소리 길게, 길게 풀리는 붕대 그리고 구토, 촛불이 타오르는 유리창 당신의 우는 얼굴이 엎질러집니다 시럽이 흐르는 접시들을 누가 난장으로 던집니까 안개의 표정으로 몽롱해지는, 긴 손가락 사이 담배 연기 욕조 속의 정사는 어땠습니까 여자의 검정 유두에 묻은 흰 구름이 정오를 지나갑니다 뒹굴뒹굴 북회귀선을 넘어가는 태양의 휠체어 인류라는 무정형의 얼굴에 던져진 원죄의 돌멩이 퍽! 칼날이 지나가는 북반구 당신은 여전히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선호합니까? 사과 아닌 사과도 없지만 사과인 사과는 더욱 없지요 서쪽 아닌 서쪽도 없지만 서쪽인 서쪽은 더욱 없는 것처럼 봉쇄된 우물…… 적막이지요 온몸이 커튼인 깜깜한 밤이 저기 옵니다 덜컥이는 틀니 아니, 사과 얼마죠?
ㅣ조정인, 『사과 얼마예요』, 민음사(2020),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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