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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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잔인한 봄날의 시간⑤ (3-31-월, 맑음)

달빛사랑 2025. 3. 31. 23:20

 

월요일이면 늘 지난밤까지 동료들의 귓가에 도달한 온갖 비어(蜚語)와 유언(流言)들이 사무실 바닥에서 생선처럼 펄떡거린다. 각각이 물어본 유언들과 모두가 공통으로 확인한 비어들은 그렇게 펄떡거리다 책상 서랍이나 책꽂이, 서류 파일 사이로 슬쩍 스며든다. 그것들은 은밀하게 숨은 채 다시 호명되기를 호시탐탐 기다리다 하루 이틀 사이에 몇 개의 새로운 사실이 보태지면 다시 사람들의 대화 속으로 소환될 것이다.

소문 속에서 파렴치한 정적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적의 명멸에 따라 우군의 표정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희한한 것은, 우리 쪽 사람들은 패배를 말하면서 불안해했고, 승리를 말하면서는 더욱 불안해했다. 침묵과 기다림이 길어지자, 패배든 승리든 빨리 이 숨 막히는 카드를 오픈하고 싶은 마음이 불안함을 가중했다. 나는 짐짓 무관심한 척했으나 사람들이 돌아서면 흐르는 말들을 빠짐없이 그러쥐고, 실현 가능성을 타산하며 불안해했다. 그리고 오늘은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볕은 좋고, 가슴은 답답해서 오랜만에 자운 누나와 혁재에게 연락했다. 혁재가 로미에게 연락한 건지 로미가 혁재에게 연락한 건지 알 수 없으나 로미도 합석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혁재와 더불어 삼정옥에서 수육과 순대, 어리굴젓을 안주로 1차를 했다. 이후 대전집으로 자리를 옮겨 스지탕과 녹두전을 안주로 2차, 혁재가 안내한 바에서 3차를 했다. 나는 흑맥주, 자운 누나와 혁재는 잭다니엘 스트레이트를 마셨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 반가운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생각보다 술이 당기질 않았다. 일행들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그래도 취해서 비틀대는 것보다 명증한 의식으로 돌아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세뇌하며 술을 마셨다.

 

자운 누나 집에 들러 마지막 입가심으로 양주를 마시며 담소하다가 누나가 불러준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술 마시고 귀가하는 날의 오랜 루틴인 아이스크림 구매는 하지 못했다. 집 앞 슈퍼는 10시 전후해서 문을 닫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문이 닫혀 있었다. 누나에게 잘 왔다고 전화한 후 주방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동실에)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별게 다 안심이라고, 한밤중 냉장고 앞에서 혼자 키득거렸다. 친누나들이 다녀갔는지 큰 냄비에 녹두 닭죽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속이 헛헛해 라면 끓여 먹으려다가 닭죽을 먹었다. 속이 한결 편해졌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 보냈다.

이 잔인한 봄날, 상처받았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됐다.

나도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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