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윤고은 장편소설 <무증력증후군>을 읽고 본문
소설 <무중력증후군>은 발랄하고 신선하다. 달의 증식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활용하면서 작가는 현대의 무기력증은 물론 판단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우리 삶속으로 틈입하는 온갖 뉴스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혹은 뛰어넘어보려는 무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핍진하게 그려낸다. 따라서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 보이는 현실의 초상이라든가 현실에 대한 판타지를 보면서 쉽사리 감정이입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작가는 심각하지 않다. 소외와 무기력함과 군중심리의 씁쓸함을 다루지만 웃음코드를 곳곳에 심어 놓아 독자들이 음울한 분위기로 침윤하는 것을 막아준다.
중력에 붙잡힌 채 두 발로 딛고 선 현실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중력주의자들은 어느 날 달의 증식으로 불어 닥친 무중력증후군에 일제히 감염되어 왜곡된 현실 속에서 환자처럼 살게 된다. 이때의 무증력증후군은 현실에 대한 불신과 가공의 상황에 대한 집착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외화된다.
주인공의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던 주인공의 가족들에게도 무증력증후군은 예외없이 나타난다. 무력한 직장인인 주인공(노시보)에게는 과민성, 혹은 심리적 병증들이 쉴 새 없이 나타나고 남성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는 처지가 뒤바뀌며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고 살아가던 고시생인 그의 형(노대보)은 고시를 포기하고 은밀하게 요리사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주인공과 같은 직장을 다니는 홍 과장과 이 과장도 그렇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소설지망생 구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달이 하나둘씩 증식함에 따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잡지사 기자인 퓰리처(별명)는 달의 증식과 관련된 무중력증후군에 대한 독점 기사를 쓰기 위해 주인공을 ‘마루타’로 활용하며 만남을 갖지만 주인공은 그녀와의 잠자리에서 결코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고 매번 주눅 들고 만다. 그러한 그의 내면에는 얼마 전 42번째로 헤어진 애인 미라에 대한 상념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어 문득문득 그의 무의식을 조종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달의 증식이라는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사태에서 받았던 놀라움이 반복되자 점차 식상함을 느끼게 된다. 한 개의 달이 새로 생긴 것은 놀랄 만한 일이지만 두 개, 세 개, 심지어 여섯 개까지 달이 증식하자 사람들은 (놀랄 만한) 뉴스에 내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무증력증후군을 앓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신의 본래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곧 달의 증식을 대신할 새로운 뉴스가 만들어지자(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잠재적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뉴스에 열광을 하고 다시 그것에 의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달의 증식이라는 알레고리는 해석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메르스 사태나 페놀수돗물 사건, 연쇄살인범, 비트코인 파장 등 다양한 항목으로 치환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화장실까지 따라붙는 확인되지 않은 다양한 뉴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언제부터인가 현대인들은 뉴스가 지적하는 문제에 분노하고 그것이 제시하는 해결책에 열광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적으로 다뤘건 상징적으로 다뤘건 이러한 문제의식을 다룬 소설은 이전에도 많았다. 다만 윤고은 소설이 그것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섣부른 진단과 해결책을 내놓기보다는 다양한 부면을 보여주면서 판단의 몫을 독자들에게 돌려준다는 점이다. 또한 우울하고 심각한 현대인의 병증을 다루면서도 결코 우울하거나 심각함을 강조하기보다는 적절한 유머와 유쾌한 상황들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을 우울함과 심각함에 매몰되지 않도록 배려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고의 내공만이 아니라 문장이 작가의 의도를 담보할 수 있을 만큼 벼려져야만 거둘 수 있는 성과들이다. 윤고은은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일정한 성공을 거뒀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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