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10)-문학평론가 김양수 본문
인천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시인들의 시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은 도시다. 자유공원에 오르면 눈에 들어오는 항구의 정경과 드넓은 황해의 수평선, 아래쪽으로는 근대문화유산이 오롯이 숨 쉬고 있는 개항장과 이국적 정조가 가득한 차이나타운, 이 모든 것들은 작가들의 창작열을 격동시키는 풍경들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특히 문학의 경우 그러한 환경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작품 속에 투영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항구의 낭만은 물론 다난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영욕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인천의 풍광은 예민한 성정의 작가들을 자연스레 배출하게 해준 역사적, 지리적 조건들이 아닐 수 없다.
김양수 역시 인천만이 간직한 지역적 감수성의 세례를 흠뻑 받고 자란 인천 토박이 문학인이다. 물론 그의 주력은 문학평론이지만 그의 명민함과 섬세한 감수성은 문학의 영역에 그를 한정시켜두지 않았다. 그는 언론, 미술, 역사, 서예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탁발한 견해(평론)를 펼쳐보였고 그러한 그의 행적은 인천의 문화예술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김양수는 1933년 4월 25일, 인천시 중구 인현동에서 출생했다. 처음에는 송림국민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인 6학년 초(1945년), 일본의 소개(疏開) 명령에 따라 충남 당진으로 내려갔고 그곳에 있던 연호초등학교에 들어가 서너 달 다니다가 해방을 맞는다. 같은 해 10월, 서울 신설동으로 상경해 집 근처에 있던 창신초등학교에 다시 들어가 서너 달 다니다가 그곳을 졸업한다. 그리고 조부모님의 권유로 당시 운영 중이던 목재소를 처분한 아버지와 더불어 다시 인천으로 내려와 1946년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입학하던 해 그의 담임은 당시 그 학교에서 수학 담당 교사로 재직 중이던 조병화 시인이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문단에 나온 이후로도 조병화 시인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가 약관(弱冠)의 나이를 막 지나치던 시기는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숨 가쁜 격동기였다. 청년 김양수에게도 이 시기는 무척 인상 깊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사업 관계상 좌익 인사들과도 교류를 갖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청년시절 조봉암, 이승엽을 비롯하여 현덕, 함세덕, 배인철, 한상억, 김창영 등 좌우를 막론한 인천 출신 정치인과 문인들의 행적을 지근에서 듣거나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의 행보들은 이념의 색깔에 따라 이합집산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반목할 수밖에 없었던 분단국 한국의 슬픈 초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예총의 전신인 문총(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는 조지훈, 김광섭이 주축이 되어 문총구국대를 만들었는데, 인천에도 인천지대가 만들어졌다. 지대장은 당시 인천 시장이었던 표양문이었고 부지대장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역임한 서예가 이경성, 이인석, 총무국장은 시인 조병화, 선전국장은 서예가 검여 유희강이 맡았다. 이 때 막 스무 살이 된 김양수는 문총 사무실을 찾아가 인천 중 시절 은사였던 조병화 시인을 만나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1948년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의 남한에서는 남로당 지휘를 받던 좌파계열 문학인들의 세력이 훨씬 강했다. 특히 인천은 좌파 문인들의 본산이었다. 앞서 언급한 현덕, 함세덕, 인천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엄흥섭, 배인철 시인 등이 당시 인천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이었다. 그러다 48년 이후 좌익검거령이 떨어지자 대부분의 좌파 문인들은 월북을 하거나 전향을 하게 되는데, 인천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격변의 현실 속에서도 인천에서는 김차영 시인을 중심으로 문예동인지 ‘문예탑’이 발간되기도 한다. 나중에 대중일보 문화부장을 역임한 시인 윤기홍, 동화작가 우봉준,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한 한상억 시인 등이 함께 참여한 잡지였다.
이러한 격변의 현실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접하면서 문사의 꿈을 벼려가던 김양수는 약관인 1953년 모윤숙 시인이 발행한 잡지 『문예』에 ‘청마 유치환론’을 게재하면서 문단에 나온다. 당시 『문예』의 책임 편집자였던 조연현(평론가, 국문학자)은 김양수의 글을 읽고, 평론이 희귀하던 시기에 평론다운 평론을 만났다며 반색을 했다고 한다. 이에 고무된 김양수는 조병화 시인의 응원을 받으며 원고지 70매 분량의 ‘랭보’에 관한 평론을 써서 잡지사에 보낸다. 하지만 잡지가 이내 폐간이 되어 활자화되지 못하고 있다가(조연현 선생이 보관하고 있었다) 투고한 지 2년 후인 1955년 『현대문학』 3월호에 게재됨으로써 본격적인 평론가의 길을 가게 된다. 김양수는 이 평론으로 제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게 된다.
이후 최성연 시인의 부탁으로 인천시에서 발행하던 신문인 <인천공보>에 도움을 주다가 나와서 당시 대중일보를 퇴사한 김흥태, 청년단체에서 일을 하던 권성호 등과 함께 『주간인천』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문화 담당 책임자와 논설위원을 맡아 보았다.) 당시 해당 잡지의 주필은 고일 선생이었는데, 향토학자는 물론 잡지 연구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 당시 『주간인천』의 인기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었다고 한다.
김양수는 인천지역 후배 문인들에게 문학적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 것으로도 유명한데, 소설가 이원규, 김진초, 이목연을 비롯하여 인천대 오양호 교수 등이 바로 김양수로부터 문학적 자문과 조언을 얻어 문단에 등단한 후 현재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과 연구를 이어가는 대표적 인물들이라 할 수 있겠다.
김양수는 자칫 건조해 보일 수도 있는 평론 문장을 매우 유려하게 구사하는 평론가로 유명하다. 그는 문학작품 속에 깃든 미의 내재적인 요소들과 강렬한 인상을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포착하여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특히 이념성이 짙은 도구적 선전 문학에 대한 거부감이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미주의자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으나 그가 겪은 생생한 역사적 경험들은 그를 단순히 고고한 예술지상주의자로 한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인천은 물론 한국 현대사의 그 파란만장했던 역사적 굴곡을 청년의 심장으로 돌파해 온 보기 드문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사족 하나, 김양수 선생은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나의 문청(文靑) 시절, 김윤식 시인이나 채성병 시인과 더불어 백항아리, 미미집, 카페 시랑, 은성다방 등을 전전하며 은성(殷盛)했던 선배들의 술자리 말석에 앉아 조용히 술 마시고 있을 때, 나는 그를 술자리에서 몇 차례 만나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워낙 대선배라서 말을 붙여볼 엄두가 나질 않아 다른 선배들, 이를테면 손설향, 김구연, 김윤식, 정승렬 선배 등과 대화를 나눌 때 옆에서 말없이 듣고만 있었지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풍겨지던 진한 인천의 향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허다한 경험을 통해 내공을 확보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밉지 않는 자부와 고집스러움을 아울러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 세월 동안 도시도 변하고 선생과 나도 많이 변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때 만났던 선생에 대한 기억이 또렷한 것이다. 무엇보다 감회가 새로운 것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추체험을 통해 문득 다시 청년으로 돌아간 내가 중년의 선생 모습을 기억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임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소중한 시간을 경험하게 해준 김양수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부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눈빛의 형형함을 잃지 마시고 강강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끝까지 보존하시길 문단의 후배로서 기도드린다.[글 : 문계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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