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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예술가(9)-성악가 양윤식 본문

리뷰

인천의 예술가(9)-성악가 양윤식

달빛사랑 2019. 11. 21. 11:07


 

양윤식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모두 인천에서 나온 인천토박이로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 한국전쟁 등 역사적 풍랑을 고스란히 감당하며 활동해온 인천의 성악가이다. 따라서 양윤식 선생의 삶 속에는 음악가로서의 풍모와는 별개로 다난했던 한국현대사와 인천의 역사가 매우 핍진하게 투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의 음악의 이력을 더듬어 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한국현대사 및 인천음악사에 대한 고구(考究)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192741, 싸리재사거리(현재 경동사거리) 근방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양윤식은 일곱 살이 되던 해, 아이가 없던 연수동 이모 집으로 잠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문학국민학교 2학년까지 다니던 그는 10살 때 송림국민학교로 다시 전학을 온다.) 당시 연수동에서 문학국민학교를 가려면 문학산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인근에 학교가 하나밖에 없다 보니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문학산 정상 어름에서 만나 함께 학교를 다니곤 했다. 그때 학생들을 인솔하던 선생님은 산을 넘다 잠깐 쉬는 동안 양윤식에게 매번 노래를 시켰다. 양윤식은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때 돌아 꽃 피어지고로 시작하는 봄노래반달등 동요를 부르곤 했는데, 이렇듯 다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받게 되면서 자연스레 노래와 음악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음악수업이라고 해봐야 창가시간이 있었을 뿐이고 중학교 시절에는 아예 음악시간이 교과에 없었던 때라서 체계적인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미술을 하던 둘째 형님에게는 일본 유학도 다녀왔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양윤식은 그를 통해 기무 후지하라 요시에 가극단 이야기를 비롯해서 유명한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 현제명, 안기영 등 당대의 유명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유성기를 가져와 처음 듣는 노래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는 형님의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들로부터 , 너 참 노래를 잘 부르는구나. 성량이 풍부하고 음성도 아름답구나.”와 같은 극찬을 듣기도 했다.

 

이처럼 선배들로부터 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음반도 접하고 그 음반에서 나오던 노래를 따라 부르곤 하던 것이 그에게는 성악가의 길을 가도록 추동한 유력한 동인(動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뒤뜰이나 산에 올라가서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용현동 근처 낙섬(落島)에 가서 혼자 노래를 부르며 성악가의 꿈을 키워갔다. 전문적인 음악교사 밑에서 기초부터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주변 인물들의 관심과 대자연 속에서 스스로 음악의 꿈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다만 중학교 다닐 때 주안에 있는 윤병득 씨가 운영하던 음악강습소에서 노래를 배운 것이 전문 교사로부터 음악을 배운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보리수등 슈베르트의 가곡과 세레나데, 우리나라의 민요, 일본의 예술가곡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노래 공부를 하던 그는 졸업과 동시에 잠수함을 건조하던 인천제강소에 취직을 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제강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음악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한 동안 하게 된 것이다.

 

1년 후 그는 조선제강소 설계과에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피아노를 치는 최성진 선생이 있었다. 최성진은 숭실전문학교를 나온 피아니스트로서 인천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음악가였다. 그와 만남을 가지며 음악 세계에 점점 빠져들어 갈 때쯤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최성진은 인천음악협회를 만들었고 양윤식 역시 그 협회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1946년 경성음악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입학안내문을 받은 양윤식은 시험에 응시해 최종합격했다. 인천 출신 합격자는 바이올린 김영환, 작곡과 전대현, 그리고 성악과 양윤식 등 세 사람뿐이었다. 당시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장은 현제명이었고 교무과장은 김성태, 학무과장은 시인 모윤숙이었다.

 

그런데 이 당시(대학입학 전후) 양윤식은 탁월한 또 한 명의 음악 스승을 만나 그에게서 4(20~24) 가까이 레슨을 받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일본유학파 출신 성악가이자 평론가인 신막(愼幕 : ? ~ 1950)이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조선음악가동맹 서기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양윤식이 대학입학 전후한 기간 내내 신막이 조직한 독일 리트(Lied : 가곡) 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거나 그와 함께 연주회에 참여하는 등 관계를 지속해 나간 걸 보면 신막에 대한 양윤식의 존경과 사랑은 각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좌파계열의 음악운동을 펼쳤던 신막과 양윤식의 만남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종지부를 찍게 된다.

 

양윤식의 이름이 언론에 알려진 것 역시 신막과의 관계를 통해서였다. 1949년 대중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해 528, 인천세계통신사가 주최하고 인천교육음악연구소와 인천신문사, 그리고 대중일보가 후원한 신막, 장보원 부처(부부)음악연주회가 현 인성여고 체육관 자리인 제일공회당에서 열렸다. 스승이었던 신막이 독창을 하고 부인인 피아니스트 장보원이 반주를 하는 이 자리에 양윤식은 찬조 출연자로 참가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대학재학 중에는 신막 선생의 종용으로 김문행과 함께 문교부 주최 음악콩쿠르에 참가해 김문행은 특상을, 양윤식은 1등을 수상한다. 물론 음악회에 참가해 노래를 부른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음악협회 회원으로 활동할 당시(고등학교 재학시절), 현 인성여고 강당 자리에 위치해 있던 제일공보관에서 인천관현악단 창립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있었는데, 그 음악회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함께 참석했던 김순남은 그 자리에서 산유화를 불렀다. 하지만 알다시피 해방공간의 사회상은 극도의 혼란 그 자체였다. 학생들 사이에도 좌우 이념의 차이 때문에 반목과 대립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따라서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다. 학교는 종종 마비상태가 되었고 양윤식은 당시 상황을 불행했던 때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이념대립의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으로 귀결되었고 결국 양윤식 역시 군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피난지 군산의 사범학교에서 수년 간(1951~1954) 교사로 일하던 그는 휴전 이후 인천으로 올라와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 음악교사(1954~1967)로 재직하게 된다. 유명한 대중가수 송창식도 이 당시 양윤식이 가르쳤던 제자 중 한 명이다.

 

인천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주원기, 최영섭 선생과 함께 기존 음악협회와는 다른 음악애호가협회(1956)를 만들기도 했는데,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최영섭 선생과 더불어 애호가협회 관현악단과 협연을 펼치기도 했다. 이후 1960년 서울음대 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는데, 당시 이명학 서울음대 교수가 반주를 해주었고 찬조로는 군사사범 시절 제자였던 온규택이 출연했다. 그리고 다시 1961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과 음악협회 주최로 인천여상 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양윤식은 협연이나 찬조 출현, 규모가 작은 음악회를 제외하고 일생에 총 아홉 번의 규모 있는 독창회를 개최하며 인천 더 나아가 한국 음악계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나갔다.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음악과 교육에 대한 헌신을 통해 온몸으로 통과해 온 그는 이후 음악예술의 저변확대와 음악인들의 소통 강화 및 권리신장을 위해 한국음악협회 경기도 지부장(8~11)을 역임하는 한편, 경기음악학원을 개원해 후학 양성에 매진해 왔다. 그렇게 열정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그는 20091129, 그의 제자와 친지들이 불러주는 레퀴엠 속에서 음악가이자 교육가로서의 지난했던 삶을 뒤로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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