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8)-민속학자/음악가 김순제 본문
김순제 교수와 나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필자가 대학생시절이었으니 아마 그는 인천교대 교수로 재직 중일 때였을 것이다.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서구에 있는 신현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김 교수는 그때 그 교회의 장로였고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었다. 크지 않은 체구에 말수가 별로 없던 그는 성가를 지휘할 때만큼은 거인처럼 보였다. 당시에 이미 인천은 물론 한국 음악계에서 뱃노래 연구자로 정평이 나있던 그가 변두리 교회의 원석(原石) 같은 성가대원들을 조련하여 세련되고 기품 있는 성가대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본 나로서는 감동을 넘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상에서는 부드럽지만 곡을 대하거나 합창을 지휘할 때는 한 순간의 방심이나 음악적 타협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 내가 서구를 떠난 후에도 김 교수가 계속 그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며 소중한 재능을 통한 헌신의 시간을 이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고인이 된 그와 이렇듯 글을 통해 다시 조우하게 되고 보니, 그리움과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교수님보다는 장로님으로 기억되는 그와의 인연이 새삼 떠올라 가슴이 먹먹한 것이다.
김순제 교수는 1922년 4월 28일, 한강을 경계로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접하고 있던 황해도 개풍군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그 또래 보통 아이들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며 개구쟁이로 지냈고 음악을 접했던 것은 모태신앙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니면 부른 찬송가와 유치원에서 배운 구전동요, 그리고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서 배운 일본노래나 군가가 전부였다.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한 것은 송도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입학식에서 만난 브라스밴드 연주에 매료된 그는 선배 연주자들의 연주 모습을 숨어서 정신없이 지켜보는 일이 잦았는데, 어느 날, 입학식에서 춤추듯 연주하던 바로 그 선생님이 그런 김순제 교수를 발견하고 “너 나팔 불고 싶으냐?”라고 물어왔다. 그분이 바로 대한제국 군악대 플루트 연주자이자 신민요 작곡였던 정사인(鄭士仁) 선생이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김순제 교수는 정식으로 밴드 대원이 되어 악기 연주를 배우고 음악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게 되었다.
물론 집에서는 음악을 하기 보다는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 같은 직업을 갖길 원했으나 간섭받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했던 김순제 교수는 자신의 개성대로 살 수 있는 음악가의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중학교3학년부터는 아예 공부와는 담을 싸버리고 음악에만 매진했다. 그러다 더욱 깊고 넓은 음악을 하기 위해 동경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유학의 길이 여의치가 않자 수업료에 포함되어 있던 수학여행비를 돌려받기도 했다. 또한 청소도 하고, 수업료를 면제 받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착실히 일본유학을 준비했다. 김순제 교수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꿈꿔왔던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 그때 일본유학 보증을 서준 사람이 바로 석주명 선생이었다.
김순제 교수가 애초에 가고자 했던 학교는 작곡가 김성태 선생이 다녔던 구니다치 음악학교였는데, 입학시험을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먼저 실시하였고 김순제 교수는 경험삼아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튿날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는 것이었다. “학장실로 올 것”이라는 메모와 함께. 학장실에 가서 확인한 결과 국어와 국사 등 학과시험의 점수는 형편없었지만 그의 청음 시험은 백점이었다. 결국 제국고등음악학교 측에서는 김순제 교수의 음악적 재능과 가능성을 보고 교수회의를 거쳐 합격시켰던 것이다. 당시 그 학교에는 김대현, 김순남, 나운영과 같은 선배들을 비롯하여 이동훈, 전봉초, 서종일 등 동기생들이 함께 재학하며 음악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1943년 2월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김순제 교수는 1945년 개성공립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직에 입문하게 된다. 그런데 개성중학교 시절에는 좌우대립이 매우 심해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수업 중에 파출소로 연행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개성중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호수돈명덕학교로 이직을 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지내다보니 동료들에게 뒤처지는 듯한 자괴감이 들었고 그래서 다시 서라벌예대로 이직했고 그곳에 재직 중 6.25를 만났다. 이후 1.4후퇴 때 군산사범학교로 내려가 그곳에서 5년 8개월 동안 재직하던 그는 1956년 미추홀구(당시에는 남구)에 소재했던 인천사범학교로 와 1962년까지 교감을 역임했으며 1962년부터 87년까지는 인천교육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사실 애초부터 김순제 교수가 교직에 뜻을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변기에 교사생활을 하게 된 그는 교사로서 회의가 드는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선생질은 안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서울 수복 당시에 잠시 성동 지역에서 근무할 때였다. 당시에는 학교에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찬 채 등교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교사로서 그것을 용납할 수 없던 그는 학생들에게 군복을 벗고 등교하라고 호통을 쳤고 한 번은 말을 듣지 않는 학생의 뺨을 때린 적이 있는데, 그것에 분을 참지 못한 학생이 권총을 꺼내 김순제 교수의 가슴을 겨누며 반항하는 아찔한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김순제 교수의 강강한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진 김순제 교수는 군산 피난시절에도 교사를 하지 않기 위해 시장에서 막걸리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중학교 시절 은사이자 목사였던 박두하 선생을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고 그의 종용에 따라 다시 군산사범의 음악교사로서 교직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김순제 교수는 인천교육대학에 재직하며 한국뱃노래와 민요 연구에 매진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무척 우연한 것이었다. 군산사범시절 학생들과 대천해수욕장으로 놀러갔을 때였는데, 한밤중에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라디오를 틀어놨나 생각하며 나와 봤는데, 그 소리는 바다 저쪽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때 김순제 교수는 그 소리가 너무도 구성지고 멋이 있어서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새벽이 밝자마자 마을로 들어가 노인 한 사람을 붙잡고 지난 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도대체 그게 무슨 노랫소린지 알고 싶어 왔다고 했더니 그 노인은 노랫소리를 들은 것이 몇 시경이냐고 물은 뒤 잠시 후 “아, 그 뱃사람들 노래, 배치기구만. 배치기 몰라? 바디소리. 고기 푸는 소릴세, 고기 푸는 소리.”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뱃사람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채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녹음기가 없어서 가사만 기록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69년에 릴(reel) 녹음기를 들고 뱃전에 오르다가 1973년에 와서야 비로소 카세트녹음기를 구입해서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뱃노래뿐만 아니라 전래 동요를 발굴하고 녹음하는 작업으로 자신의 작업을 확장하였고 그가 발굴하여 녹음하고 채보한 우리나라 각 지역의 뱃노래만 해도 1500여 건에 달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난하고 성실한 작업의 결과물 중 155곡을 엄선해서 <한국의 뱃노래>(1982년, 호악사)를 출간하게 되는데, 이 책은 자칫 잊힐 뻔했던 한국의 뱃노래를 지역과 종류별로 생생하게 되살려낸 전통음악계의 커다란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상기(上記)한 작업들과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88년 인천예총 지회장을 맡아 지역문화예술의 발전과 소통을 위해 헌신하기도 하였고 1991년에는 문화재 감정관 등을 역임하며 자신의 지식과 경륜을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과 헌신의 결과 그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76년 국민훈장석류장, 1982년 인천시문화상, 1987년 국민훈장모란장, 1990년 향토문화대상 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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