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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좋은 사람들과 먹는 밥은 늘 맛있다. 그저 장삼이사들이 흔히 찾는 국밥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을 때는 그 어떤 요리보다 맛있는 국밥이 된다. 음식은 혀로만 맛보는 게 아니라 눈과 귀, 가끔은 손끝으로도 맛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식을 같이 먹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유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대화,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식탁의 분위기 등이 또 하나의 양념이 될 때 평범한 국밥은 비범한 소통의 매개이자 특별한 음식으로 거듭난다. 나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식탁의 분위기가 따스하게 깊어 가는 과정을 지켜볼 때마다 소년처럼 가슴이 설렌다. 오늘 박 실장(전 비서실장), 보운 형과 함께 오랜만에 만수동 ‘이화순대’를 찾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곳을 찾았을 ..

아직도 여름, 여전히 여름, 도대체 언제까지 여름? 오늘도 매우 더웠다. 9월 날씨가 섭씨 31도에 체감온도 35도라니, 기가 막혀라. 다음 주가 추석인데, 곡식은 잘 패겠네. 그나마 다행이다. 곡식 영글 때 폭우가 쏟아지거나 태풍이 찾아와 일 년 농사를 결딴나게 할 때가 종종 있었지. 아무튼 아직도 날씨가 한여름 같은데 추석 명절이 다가오니 이제 추석은 가을 명절이 아니라 여름 명절이 돼버린 건 아닌지. 하긴 늦여름 혹은 초가을 날씨는 며칠 사이에 변화가 조변석개라 속단할 일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여전히 에어컨을 켜야만 잠을 잘 수 있다는 건 가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소 억울하다. 그만큼 가을은 짧고 여름이 길다는 말일 테니까. 언제부터인가 여름은 봄과 가을의 몫까지 빼앗아 자기 몸집을 키우더니 이제..

무난한 월요일이었다. 퇴근 무렵 Y가 연락하기까지는. 연세대에서 있었던 모종의 행사에 참석했던 Y는 행사가 끝나고 교정을 걸어 나오며 나에게 전화했다. "선배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연세대 몰라보게 달라졌네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지금 내려오는 중이야? 그럼 잠깐 볼까?" 했더니 "공항철도 타고 내려가고 있으니 계산역에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했다. 7시 30분, 계산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7시 45분, 시청역에서 Y를 만났다. 포니테일 머리를 한 Y는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직장을 그만둔 후 처음 만났다. 말투나 표정은 여전히 발랄했다. 우리는 교육청 앞쪽으로 걸어오며 적당한 맥줏집을 찾다가 예술회관역 근처까지 와서 투다리를 발..

새벽에 일찍 깼다 다시 잠들어 9시가 넘어서 비로소 일어났다. 정신 차리고 운동을 끝내니 오전이 다 갔다. 점심에는 어제 삶아 놓았던 면에 남은 콩국물을 넣어서 먹었는데, 오늘부터는 면 섭취를 줄이겠다고 다짐했던 터라서 다소 민망했다. '남은 음식을 버릴 수는 없잖아'라는 핑계가 항상 문제다. 더 황당했던 건 남은 국수에 비해 콩국물이 부족해 밥상을 차려놓은 상태로 슈퍼에 가서 콩국물을 한 팩 더 사 왔다는 것이다. 결국 또 콩국물이 남았고, 그 콩국물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면을 삶아야 한다는 것, 악순환이다. 남은 음식에 관대해지면 다이어트는 물 건너 간 거다. 남은 음식에 냉정해지기 어렵다면 애초에 음식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음식에 관한 한 손이 큰 편이고 모자란 것보다는..

화가이자 마을활동가인 후배 이진우의 딸 결혼식에 다녀왔다. 식장은 지하철 2호선 문래역 근처 ‘규수당’. 축의금만 보내려고 하다가 문래역이 생각보다 멀지 않아서 그냥 다녀왔다. 전철도 때맞춰 플랫폼에 들어가자마자 도착했다. 심지어 용산행 급행도 3분 정도 기다렸다가 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집에서 규수당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20분, 빠른 편이었다. 예식 시간보다 20여 분 일찍 도착해서 혼주인 후배 내외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혼자 갔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예식은 보지 않고 곧장 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미술위원회 정렬 형과 후배 평안, 영옥 등을 만나 함께 식사했다. 평안과 영옥은 약속 있어 먼저 가고 강화의 허용철 형이 늦게 도착해 형이 식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예식장을 나왔다. 문..

참 희한하지.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매번 어긋나는 건지 모르겠어. 길이 어긋나고 관계가 어긋나고 시간이 어긋나고 상황이 어긋나고, 마치 통속소설의 주인공들처럼, 텔레비전 드라마의 익숙한 클리셰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못 알아보고, 간발의 차이로 버스는 떠나가고, 고백하기로 결심한 날 일이 생기고, 이쪽 마음이 지극해지면 저쪽 마음은 시들해지고…… 참 알 수 없단 말이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암만 멋지면 뭐 해. 사랑하는 사람이 매번 그 멋을 접수할 수 없는 시공간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젠장, 헛물켜는 거지. 가끔 그렇게 매번, 지독하게 어긋나기만 하다가 요행히 두 개의 사랑이 같은 시공간에서 만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 좁고 짧고 얕고 낮은 곳을 몇 번이나 지나치고 수년간 ..

결론부터 말하면, 올해 내 생일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내 생일은 대체로 그날 시간 되는 선배나 후배, 또는 우연히 연락이 닿은 누군가와 술 한잔 하는 게 다였다. 심지어 아들에게조차 연락도 없던 적이 여러 번이다. 나도 아들의 생일을 챙기지 않으니 피장파장일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나는 아비고 저는 자식인데’라고 생각하며 서운함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올해 생일에는 아들이 전화도 하고 용돈도 30만 원이나 부쳐주었다. 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누나가 아들에게 “수현아, 오늘 아빠 생일인데, 알고 있지? 가보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나 문자로라도 축하한다고 연락해라”라고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누나는 내가 생일인데도 아들의 연락조차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일을 보내는 게 ..

그러나 내가 있는 이곳은 폭풍으로부터 안전지대. 폭풍은 나를 늘 비껴간다.이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 슬프고도 우습네. 요즘 큰누나가 자주 집에 온다. 다양한 이유를 대지만 결국 아직은 매형 없는 빈집에 혼자 있기가 불편한 거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그랬다. 집에 돌아와 엄마의 방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 무척 힘들었다. 물론 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엄마의 화초가 꽃을 피우거나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을 때면 느닷없이 엄마가 생각나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서 있곤 한다. 누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슬쩍 내가 “당분간 같이 살래요?”라고 한마디 하면 기다렸다는 듯 그러자고 할 것 같다. 누나가 오는 날은 오랜만에 집밥 같은 집밥을 먹는다. 오늘도 생갈치를 졸이고 콩나물을 무쳐서 함께..

큰누나의 제안으로 형제들이 함께 점심 먹었다. 이번주 목요일이 내 생일인데, 아마도 누나는 그걸 염두에 두고 밥 먹자고 한 것일 게다. 오랜 기간 혼자 살다 보니 생일이 와도 특별한 감흥은 없다. 아들놈은 전화 한 통 없고 오히려 친구나 후배들 중 몇몇이 연락해 오긴 하지만, 그걸 빌미로 술 마시는 일도 귀찮고 내가 태어난 게 정말 이 세상과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일일까 의구심만 들어 생일이 오히려 귀찮을 때가 더러 있다. 오늘도 그랬다. 하지만 남편이 죽고 난 후 매번 다양한 이유를 붙여 형제들과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누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다만 원래는 누나들과 셋이서만 집 근처 식당에서 갈비탕이나 삼계탕을 먹을까 했는데, 큰 누나가 기어코 막내에게도 연락해 동..

오전부터 오후까지 게릴라처럼 비가 내렸다. 우산을 들고 출근했지만, 우산을 두고 퇴근했는데, 청사 현관을 나서자마자 빗방울 톡톡 떨어졌다. '주르륵'이 아니라 '톡톡'이었으므로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 우산 가져올 생각을 하다가, 말았다. 대신 전철 타러 가다가 갈매기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그건 흔한 일이다. 비는 내 정서의 색깔과 무게와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사물이다. 여러 번 비에 휘둘렸으나, 비에 휘둘리는 마음이 부끄러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나도 알고 비도 안다. 비는 늘 내 앞에서 당당하지만, 그렇다고 비가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건 아니다. 항상 있는 게 아니라서 어쩌면 더 당당하게 구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만 해도 보운 형과 점심때 양평해장국 먹으로 cgv 쪽으로 걸어가는데, 빗방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