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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현실은 무척 암울했으나 10월의 교정은 아름다웠지. 백양로 위를 노랗게 물들이던 은행잎들과 잎이 지기 시작하는 청송대의 오후, 텅 빈 노천극장을 스치며 불던 바람, 가정대 숲 속에서 바라보던 저녁노을, 학생회관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가을비, 휴게실 ‘푸른샘’에서 들려오던 코헨의 굵은 목소리, 루스 채플 앞 잔디에 누워 바라보던 푸른 하늘, 낙엽을 모아 은행을 구워 먹던 용재관 뒤뜰, 단골 술집 ‘다리네’와 거친 막걸리, 그곳에서 만난 울림터 후배들과 투박한 운동가요들, 카페 ‘연’에서 외상으로 만났던 들국화와 다섯손가락의 노래들, 그립다. 노래로 말하고 꿈으로 숨을 쉬던, 젊은 날의 숱한 '그해 10월'들. 10월이 시작되었다. 하늘도 바람도 내가 아는 사람들도괜스레 아름다워지는 때다. 눈 뜨자마자부터..

나에게 9월은 고마웠던 달이다. 명절을 품고 있어 오래 쉴 수 있었고, 가기 싫어하는 여름을 다독거려 보내는 한편 가을바람 한 자락을 풀어놓았다. 여름과 가을의 징검다리 9월이 가고 나면 이제 남은 달은 3달뿐. 앞자리 선배는 “벌써 10월이야? 생각해 보면 술만 마신 거 같은데 벌써 아홉 달이 흘러가 버렸네”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올해가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후루룩 아홉 달이 흘러간 것이다. 오전에는 정책협의실 직원 중 나를 빼고 모두가 외근 나갔고, 손님들은 어느 때보다 많이 찾아와 북적거렸다. 밖에서 점심 먹고 조금 늦게 귀청하고 있을 때, 박 실장이 전화해 사무실 출입문 비밀번호를 물었다. 사무실 앞인데 문이 잠겨서 전화했다고 했다. 비밀번호를 알려준 후 부랴부랴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박 ..

어제 개코네 식당에서 우리 일행들에게 인사하러 온 국민의힘 지역위원장에게 쓴소리 한 게 종일 맘에 걸렸다. 정작 당사자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내 지인들의 황당해하는 표정이 잊히질 않기 때문이다. 한때 내 운동의 동지였던 그 ‘늙은이들’이 언제부터 그렇듯 온정주의자들이 되어 버린 건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물론 인사차 온 사람에게 쓴소리 한 건 내가 생각해도 좀 그렇긴 하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정치 좀 제대로 하라고 일러주세요.”라는 말이 못 할 말은 아니잖은가? 정색하고 한 말도 아니고 농담조로 던진 말이라는 건 누가 봐도 뻔했는데, 말을 들은 당사자보다 내 동료들이 더욱 황당해했다는 게 아침 내내,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특히 C형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오전에는 채소가게에 들러 오이와 고추, 깻잎과 청경채를 사다 놓고 쉬다가 점심에 오랜만에 잔치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채소 사러 가다가 만난 가을하늘이 너무 청명해 가끔 테라스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온은 생각보다 높은 하루였다. 9월의 날씨치곤 더워서 장 보고 오면서 땀을 뚝뚝 흘렸다. 늦더위가 정말 집요하다. 오후에는 잠깐 낮잠 자고 일어나 빈둥대다가 6시쯤 부평 풍물 축제 구경하러 가려고 집을 나섰다. 저녁때가 다 됐지만 날은 여전히 뜨거웠다. 6시 30분쯤 개막식이 벌어지는 주무대에 도착했을 때, 무대에서는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교육감 축사까지만 듣고 개코네 막걸리로 이동하다가 보운 형과 교육감 수행비서를 비롯한 교육청 직원들을 만났다. 아마 오늘 낮에 도원 축구장에서 열린 새..

요 며칠 의뢰받은 자서전 교정하느라 고생했더니 입술 주변에 물집이 잡혔다. 확실히 면역력이 떨어지니 이런 일이 잦다. 잠을 설치며 뭔가에 집중했다 하면 영락없이 입술 주변에 물집이 생긴다. 요즘 탄수화물 관리를 안 해서 더욱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60대의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좋고 나쁜 것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그 ‘정직한 반응’이 좋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아무튼 입술 주변이 볼썽사납다는 핑계로 집에 있기로 했다. 뭔가 집중했던 하나의 과제를 완수하고 나면 루틴처럼 술집에 들러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이번에는 피부 트러블을 핑계로 집에 있기로 했다. 내일 부평 풍물 축제에 가게 되면 지인들과 함께 술 마실 게 뻔하다는 사실도 집에 머물기로 한 이유 중 하나다. 어제 장(張)이 전화해..

■오늘, 철없는 늦더위의 몽니를 달래느라 분주한 가을바람과 함께 시집(박상률, 『그케 되았지라』, 걷는사람)과 소설집(김영범, 『불온한 외출』, 도화)이 내게 왔습니다. 한 권의 시집과 소설집이 나오기까지 시인과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 고민하고 영혼을 갈아 넣는지를 알기에 한 작품, 한 페이지도 허투루 읽을 수가 없습니다.■특히 이번 상률 형의 시집에는 어머님을 간병하며 쓴 시들이 많았는데, 형의 애틋한 마음과는 무관하게 점점 아이처럼 무구해지고, 자주 까무룩 까라지시는 어머님의 건강이 걱정되어, 읽다가 자주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형의 시들에 관한 따뜻하고 자세한 분석은 정우영 형이 이미 시집 해설(‘유연하고 속 깊은 성찰의 세계’)에서 ‘속 깊게’ 해 놓으신 터라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

상처를 덮은 거즈 위로 붉은 피가 스미듯 적당한 온도의 물과 만난 다기(茶器) 속 차(茶) 향(香)이 물과 공기 속에 퍼지며 스미듯 기쁜 당신의 마음속으로 슬픈 당신의 눈물 속으로 끝내는 지극히 구체적인 당신의 아픔 속으로 스며들 수 있다면 모든 뿌리들에 빗물이 스미듯 열매의 속살에 가을 햇볕이 스미듯 무척이나 그윽하고 자연스레 스며들어 어느 날 문득 힘든 당신이 뒤를 돌아봤을 때 익숙한 풍경처럼 오랜 그림처럼 나 그곳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대의 손과 내 손이 만나 이루는 수줍은 호선(弧線)처럼 그렇게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스며들 수 있다면 스며들어 끝내는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문계봉, ‘동화(同化)―운유당(暈遊堂) 서신(書信)’

민예총 창립 30주년을 맞아 회원 좌담회를 열었다.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경청하는 좌담회는 마지막 순간 뭔가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토론회보다 확실히 재미있다. 게다가 한 사람, 혹은 한 조직의 30년 역사를 훑어보는 일은 얼마나 다채롭고 극적인 일인가? 청년 시절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현재까지 자신이 걸어온 실천의 이력을 돌아보는 일, 붉은 심장 속 푸른 꿈을 품은 채 불투명한 미래와 고달픈 현실에도 겁먹지 않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무척이나 가슴 뛰고 설레는 일이다. 한결같이 한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그 자체로 뿌듯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은 고민 많았던 변곡의 순간들을 생각하며 추억에 젖었던 시간, 파릇한 청년이었던 후배의 하얗게..

오늘은 정말 월요일 같지 않은 월요일이었어. 요 며칠 사이에 월요일을 두 번 겪은 느낌이야. 지난 목요일이 그랬어. 아침에 잠 깼을 때 흡사 월요일 같았지. 5일간의 긴 휴무 끝에 출근하는 날이라서 그런 걸 거야.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경험이 한두 번씩은 있지 않아? 어릴 때 자다가 깨서 사위(四圍)를 둘러본 후 학교 가야 한다며 부산을 떤 경험 말이야. 실상은 오후의 낮잠이 너무 깊었던 탓에 잠에서 깼을 때는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렸던 거지. 멍한 그런 모습을 본 형이나 누나가 “야, 뭐 해. 학교 갈 준비 안 하고” 하며 채근하고 엄마까지 동조해 일부러 지청구를 주면 자기가 너무 오래 자서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것인 양 부랴부랴 학교 갈 준비를 하다가 모두에게 놀림당한 일 말이야. 나는 얼마 전에도..

바람도 좋구나. 오늘 하루! 불과 사나흘 차이로 이렇듯 계절의 숨결이 선명하게 바뀌다니, 시간은 얼마나 믿음직한 자연의 분장사인가. 이제는 머잖아 청한 가을 햇살이 온 산천을 비출 때마다 붉고 노란 물결이 파도처럼 출렁이겠네. 일요일이지만 연휴 뒤의 휴일이라 일요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비 내린 후 청명해진 가을 하늘과 맑은 공기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힘든 여름을 견딘 나에게 주는 가을의 보너스. 좋다. 저녁에 누나들이 왔다. 주방에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더니 김치찌개를 끓이고 샐러드를 만들고 감자채볶음을 만들어 식사했다. 나는 그녀들이 오기 전에 이미 이른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잠자러 들어간 후 9시쯤 땅콩버터를 바른 식빵 두 장과 사과 두 쪽,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