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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계획은 깨졌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던 하루였다. 어제 백신도 맞았고 원고도 교정해야 해서 주말은 꼬박 집에 머물기로 작정했는데,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 계획대로만 되던가. 권 선생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꼭 넣어달라고 부탁한 (권 선생은 교정과 윤문을 끝내고 디자인과 편집 작업에 들어간 이후에도 수시로 새로운 원고를 써 보내며, 그야말로 추가해 달라며 ‘떼를 써서’ 편집자들과 나를 무척 피곤하게 했다) 추가 원고 ‘추모원 가는 길’을 윤문 하다가 대학 후배(은진이는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했다)이자 문화운동가인 은진, 정혁 부부의 전화를 받았다. 은진이는 “작전동에 업무차 왔는데, 정혁이가 계봉 형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네요. 형, 오후에 시간 돼요?” 하고 물었다. 순간 ‘일해야 하는데……, 게다가 백신..

기온이 그야말로 ‘뚝’ 떨어졌다. 한낮은 물론 잘 때도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선선해졌다. 게다가 새벽부터 비도 내렸다. 비는 장맛비처럼 종일 내렸다. 근래에 만난 비로는 최고 강우량이 아닐까 생각된다. 출근해서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으니 새로운 의욕이 솟는 것 같았다. 이래서 휴식이 필요하다. 얼추 일주일 만에 만난 사무실 동료들은 명절 후일담들을 풀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족들이 많으면 일화도 많은 모양이었다. 마을 교육특보인 K 목사는 이번 명절에 미국에 있는 형제들과 조카가 귀국한 모양이었다. 특히 조카는 미군이 되어 한국으로 배치된 건데 그의 안내로 형제들이 미국 캠프를 구경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보운 형은 술꾼답게 지인들과 술 마신 이야기와 갑자기 형수가 새 아파트..

긴 연휴가 끝났다. 명절 내내 비교적 평온한 시간이 흘렀지만, 막상 연휴가 끝나니 알 수 없는 헛헛함이 밀려든다. 매일 거센 강도로 일해 온 사람도 아니면서 연휴 끝났다고 뭔 놈의 헛헛함을 느낀다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하긴 하지만, 이런 느낌은 명백하고, 또한 익숙하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부모님 생전, 명절 인사하러 온 가족들이 왁자지껄 떠들다가 돌아간 후에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특히 엄마의 감정에 내 감정을 자주 이입하던 때에는 자녀들이 돌아간 후 썰렁해진 집에서 엄마가 느꼈을 쓸쓸함에 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풀어진 마음조차 용인되던 휴식의 시간이 끝나거나 왁자지껄하게 함께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내 헛헛한 고적함이 찾아드는 것이다..

연휴가 시작될 때는 ‘하, 길고 긴 연휴 동안 뭘 하고 지내나?’라고 생각했지만, 거짓말 안 하고 5~6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대체로 내가 한 것이라고는 먹고 운동하고 자고 영화 보고 유튜브 동영상 본 게 전부다. 가끔 영상 보다가 엄마 생각나고 유년 시절 생각나서 눈물 몇 방울 흘리거나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받은 문자들에 답장을 보냈다. 분명 6시쯤 눈을 떠 하루를 일찍 시작했는데도 점심 이후부터는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흘러 버리는지, 하루가 후딱 가 버리곤 했다. 나이대에 따른 시간의 속도론, 이를테면 10대는 10㎞, 30대는 30㎞, 60대는 60㎞의 속도로 세월이 흐른다는 속설이 진부한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요즘에는 자주 한다. 오후에는 연극쟁이 후배 BK에게 연락했다. 설날과 추석, 1년에 ..

나누고 헤아리고 위로하는 명절, 기억하고 다짐하고 충전하는 명절, 다친 마음도 무심코 지나쳐 온 마음도 치유하고 돌아보고 회복하는 명절, 날 선 마음들은 유순해지고 여럿이 함께해서 더욱 행복한, 그런 추석 명절 되기를 기원합니다.

요 며칠 계속된 불면 때문에 침구의 방향을 바꿨다. 혹시 북쪽에 머릴 두고 자서 그런 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 풍수나 수맥에 관한 전문가들이 방송에 나와 머리를 북쪽이나 수맥이 흐르는 방향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걸 들은 바 있다. 상기한 전문가들의 주장을 듣다 보면 일견 ‘그럴 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그 주장들이 과학적으로 맞는 얘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만에 하나 플라세보 효과라도 얻어볼 생각으로 잠을 설치고 일어난 늦은 아침 침구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일단 오후에 낮잠을 잤을 때, 생각보다 단잠을 잔 걸 보니 적어도 플라세보든 뭐든 효과는 있어 보였는데, 사실 잠자는 방향을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니 낮잠이 달게 느껴진 건 잠자리의 방..

느지막이 일어났다. 누나들은 돌아가고 깨끗하게 정리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형제들 같으니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더니 못 보던 반찬들이 많이 들어찼다. 가기 전에 만들어 놓고 간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집에 누가 오는 게 무척 귀찮다. 심지어 아들이 오는 것조차. 믿을 수 있겠는가, 아들이 와도 자고 가는 건 싫었다. 일단 그 아이는 무척 집을 어지르기도 하고, 또 아이가 있는 이상 계속 신경을 써줘야 한다는 아비로서의 강박 때문이다. 정작 아들은 전혀 미적거리지 않고 “아빠, 갈게요”하고 이내 떠나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누나들은 성별이 달라서 서로 삼갈 것도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그녀들은 자꾸만 말을 시킨다. “동생, 이거 먹어 봐”, “동생, 이거 빨아 놓을까?”, “동생, ..

오전에는 채소 가게 들러 양파와 가지, 두부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아이스크림도 한 통 샀다. 대체로 청소하고 운동하고 낮잠 자며 오후를 보냈고 저녁에는 누나들이 족발과 도토리묵, 자두와 각종 반찬거리를 가지고 집에 와서 함께 저녁 먹었다. 막내만 빼고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우리 3남매는 자주 만나 밥 먹는다. 확실히 북적거리며 함께 먹는 밥이 맛있고, 밥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도 맛있다. 밥을 다 먹고 상을 치우던 큰누나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조카는 아버지 없이 맞이한 첫 번째 명절이라서 엄마가 걱정됐던 모양이다. 큰누나는 일부러 큰소리로 “이모와 함께 큰삼촌네 왔어.”라고 수화기 너머 조카에게 말했다. 욕실에서 이를 닦던 나는 아들과 나누는 큰누나의 들..

어제는 오랜만에 혁재를 만났다. 종일 비 내리고 내게는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라서 갈매기에 들러볼 생각이었다. 혁재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밥 먹는 중이었고 아침부터 막걸리도 이미 두 병을 마신 상태라고 했다. 아침부터 마신 게 2병이라면 혁재에게는 그야말로 입만 축인 셈이다. 은준에게도 연락했으나 그는 이미 낮부터 술 마시기 시작해서 퇴근 무렵 내가 전화했을 때는 피곤해서 도저히 갈매기까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비 내리니 다들 말랑말랑해지는 감상을 주체할 수 없었나 보다. 거세게 내리던 비는 퇴근 무렵에는 잠시 부슬비로 바뀌어서 전철 타고 가려던 계획을 바꿔 중앙공원 산책로를 걸어 갈매기로 향했다. 날은 습하고 더웠다. 가을비가 내려도 시원하기는커녕 더욱 덥게 느껴지는 건 생전 처음이다. 갈매기에 도..

점심 먹고,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빗속을 걸어 오랜만에 치과에 들렀다. 저작과 교합 상태를 확인하고 가끔 볼이 씹힌다고 말했더니 주치의는 그라인더로 어금니 끝을 살짝 갈아주었다. 그리고 치아 면을 깨끗하게 닦아주었고 치아와 잇몸이 닿는 부분에 낀 이물질을 제거해 주었다. 그리고 사진 7장과 동영상을 찍었다. 그러면서 "관리를 잘했네요. 이렇게만 하세요. 이번에는 4개월 후에 오셔도 될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치료대 앞에 걸린 모니터를 보니 진료비가 4만 원이고 환자 부담금은 12,000원이었다.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4만 원이라니, 이래서 병원 측에서는 환자가 자주 내원해 주길 바라는 모양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의사들의 노동 가성비는 끝내준다. 하긴 의사 면허를 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