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이 끔찍한 기시감을 어쩔 것인가? (11-11-金, 맑음) 본문
그날, 그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도시를 할퀴고 간 다음 날 아침, 나는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23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라앉은 추모식 현장에는 많은 희생자가 나온 전날의 참사로 인해 한층 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참석자들의 헌화가 끝난 후, 검은 양복 차림의 교육감이 추모사를 했고, 유가족 중 한 명이 나와 비장한 목소리로 조시를 낭독했다. 뒤이어 나온 유가족 대표는 간밤에 벌어진 ‘10.29 참사’를 언급하며 23년 전 희생된 57명의 학생을 추모하는 동시에 정보공개가 원활하지 않은 행정의 난맥을 결연한 목소리로 지적해 나갔다.
그러나 정작 추모식 내내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제단의 오른쪽에 세워져 있던 ‘엄마’라는 리본이 매달린 근조 화환이었다. 23년 전 희생된 자식의 기일을 맞아 엄마가 애통한 마음으로 보낸 화환이었을 것이다. 먼저 간 자식의 기일에 근조 화환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식을 둔 아비로서 그 참척(慘慽)의 고통에 감정이 이입돼 추모식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해마다 이맘때 열리는 추모식은 희생자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자리이자 다시는 이 땅에 23년 전 참사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결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나 이번에 벌어진 10.29 참사는, 23년 전 죽어간 영혼들 앞에서 우리가 행한 약속과 다짐을 우리 스스로 끝내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 자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추모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드는 끔찍한 기시감에 가슴이 벌렁거렸을 게 틀림없다.
그렇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기시감이다. 23년 전 화마에 휩싸여 안타깝게 숨져 간 57명의 희생자와 79명의 부상자가 떠올랐을 것이고, 8년 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25명의 어린 학생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게 나라냐?”라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하늘을 보며 분노했던 그날의 일들이 스멀스멀 의식 속으로 틈입하는, 몹쓸 기시감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23년 전 희생도 막을 수 있었고, 8년 전의 비극도 막을 수 있었다. 이번 10.29 참사 역시 다르지 않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참사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더욱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기시감은, 참사의 현실은 이미 엄연하고 희생자가 대거 발생했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29 참사를 바라보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은 정말 놀라웠다. 사고의 원인과 전후 상황을 따지기 전에 그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관계 장관으로서 가장 먼저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참사는 불가피한 ‘사고’였을 뿐 경찰의 대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고 말을 해 국민의 공분을 샀다. 과연 이게 관계 장관이 할 수 있는 말인가? 이런 염치없는 인물을 장관으로 둔 우리 국민이 너무도 안쓰럽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탄식을 세월호 참사 8년 후에 다시 하게 될 줄이야.
참사 초기 정부와 일부 언론들은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을 개인의 불운과 불의의 사고로 호도하려 했다. 하지만 전쟁이나 테러, 자연재해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156명의 목숨이 서울 한복판에서 한날한시에 희생당했다. 이것을 과연 개인의 불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활짝 젊음을 꽃피워야 할 청춘들이 생때같은 목숨을 잃었는데, 불가피한 사고였고, 경찰의 대응은 정당했다고? 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도대체 정부의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오히려 외신들이 앞서서 한국의 안전 체계를 진단하고 한국 정부보다 더욱 진정성 있는 애도의 마음을 전해왔다. 부끄럽지 않은가? 직무 유기를 변명하기에만 급급하고 참사의 원인을 따져보려는 사람들을 불온시하며 진정한 추모와 애도의 길을 방해하는 나라, 이것이 23년 전 인현동에서 우리가 만났던 관(官)의 모습이었고, 8년 전 우리가 분노했던 국가였으며 엊그제 기시감 속에서 다시금 확인한 현 정부의 생생한 민낯이다. 뒤늦게 사과하고 형식적인 수습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미 진정성을 잃은 정부의 사후 조치를 진심으로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한책임의 자세로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게 국가의 임무다. 그러기에 국민은 세금을 내고 국가와 정부에 자신들의 안전을 의탁하는 것이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대규모 참사 앞에서 변명만 늘어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는 부도덕한 정부다. 따라서 스스로 책임지지 못한다면 국민이 나서서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는 것, 그것이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추모라고 나는 생각한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이 끔찍한 기시감을 어쩌란 말인가?
비서실장이 너무 힘들어해서 걱정이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 안 보태서 청사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어찌나 이기적인 민원인들이 많은지,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정도다. 그래도 상호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 교사 노조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단체 교섭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양보할 건 양보하고 얻어낼 건 얻어내기 위해 대화하고 조율하고 타협하는 게 교섭의 원칙인데, 그게 잘 지켜지질 않는다. 비서실장이 민주노총 사무처장 출신인데, 아무려면 자본가들처럼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교섭을 진행하겠는가? 법대로 하면 노조가 잃을 게 훨씬 많을 텐데...... 그걸 몰라주니 답답하다.
저녁에는 후배 찬영이와 술 약속이 있다. 그런데 그가 지방(정읍) 출장에서 올라오고 있는 까닭에 (8시나 되야 인천에 도착한다는데) 이른 퇴근 이후 갈 데가 마땅치 않다. 갈매기에 가 있자니 술 마시게 될 것이고, 집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자니 시간이 어중띠고.... 용궁정에서 만나자는 걸 보면 민어를 먹을 생각이고 술 한잔하자는 것일 텐데, 찬영이가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약 두 시간 동안) 혼자 갈매기에 앉아 술 마시다가 자칫 취할까 봐 그게 걱정인 거지. 퇴근 시간은 다가오는데 어찌해야 할지 고민되네. 오늘은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 같아서 일단 맨정신 모드로 시작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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