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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잔인한 봄이다. T.S.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달 4월이 코앞이다. 4월에는 뭔가 기쁜 일이 있을 것 같다고, 아니 있어야 한다고 버릇처럼 되뇌는 하루하루다. 어제는 잠깐 빗방울 떨어졌고 오늘은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다. 기온도 5~6도나 뚝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더니 한겨울처럼 썰렁했다. 22도에 맞춰진 보일러가 돌지 않아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주방에 가서 우유를 컵에 따르며, ‘세상이 거지 같다 보니 날씨도 거지 같군’ 하고 생각했다가 최근 들어 자꾸만 마음이 뾰족해지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그러나 놀랐다고 뾰족해진 마음이 이내 부드러워지진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세상이 달라지기 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병이기 때문이다. 정의가 죽고 염치도 죽은 세상에서 마음의..

춘래불사춘, 올봄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적합한 말이 있을까. 기왕에 봄은 왔지만, 봄이 오는 길에 우울도 함께 왔는지 나의 봄은 온통 우울하다. 내 안도 바깥도 온통 우울한데, 혹시 내 우울과 당신의 우울이 만날까 두렵다. 늦은 밤, 카페 ‘산’ 대표인 후배 성식이 전화해서는 “형, 우린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아니에요?” 하고 묻고는 뭔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놨는데 졸려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생각나진 않는다. 다만 “조만간 밥 먹어요. 제가 살게요”라는 말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할 말을 마친 성식은 “형, 이제 혁재 바꿔줄게요” 하며 혁재에게 전화를 넘겼다. 그는 약간 취한 목소리였고, 로미 씨도 함께였다.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더니 “괜찮아요. 아직은” 했는데, '아직은'이라니? 사실 그건 ..

서너 달의 대립과 갈등, 욕설과 저주, 분노와 슬픔이 난무하는 현실이 나의 일상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내 심약한 영혼은 구겨진 휴지처럼 엉망진창이 되었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사람을 만나도 반갑지가 않다. 한동안 물러갔던 불면이 다시 찾아왔다. 조지 오웰의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소설 『동물농장』속의 돼지 나폴레옹이 현실의 '악마들'과 자꾸 겹쳐 보였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 ‘악마들’에 의해 시작된 짐승의 시간이 시나브로 우리 삶의 소중한 모든 걸 잠식하고 있을 때, 강산조차 울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붕괴하고 공직자는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는 현실 속에서 실화(失火)에 의한 산불은 우리 산천을 집어삼키고 있다. 마치 악마가 내뿜는 지옥불처럼 수십 명..

오늘 점심에는 전 비서실장 박(朴)과 함께 보운 형이 소개한 십정동 게장 전문 식당을 찾아가 게장정식을 먹었다. 원래는 나, 박 실장, 보운 형, 유(柳) 정책기획 조정관 등 4명이 먹을 예정이었는데, 시의회에 참석한 유 조정관은 의회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처음 방문했던 탓에 잠깐 방향감각을 잃었다. 45층 마천루가 식당 앞쪽으로 즐비했다. 십정동에 방문할 일이 없다 보니 처음 만난 달라진 마을 풍경이 무척 생소했다. 오늘 방문한 식당 이름은 ‘돈타래 게장정식’이고, 게장정식 가격은 1인당 15,000원이었다. 가격만 봤을 때는 그리 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식탁에 깔리는 반찬들을 보고 나니 비싸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게장정식을 주문했더니..

기다리는 소식은 더뎌 답답하지만,봄도 꽃을 피우기 전 자주 고요하다.그 의도된 고요 속에서 뿌리들은끊임없이 물을 끌어올리고,잎과 가지들은 수없이 흔들리며 햇살을 품는다.능청맞은 침묵이 지배하는 봄날 오후,절망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이 봄을 부디 희망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더욱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는다.저녁에는 수홍 형의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백운으로 넘어가 부평구에서 술 마셨다. 오라는 식당(연탄불고기집)으로 갔더니 수홍 형 친구 화규 형과 후배 창호가 먼저 와 있었고, 나중에는 김 목사도 참석했다. 얼마 전에 취직한 화규 형이 한턱내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술이 들어가자 '왼손이 하는 일을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는' 수홍 형과 후배 창호가 말다툼을 벌였다. 부평의 규모 있는 축..

탄핵 재판이 시작된 지 벌써 삼 개월이 지나고 있다. 처음에는 며칠 내로 윤곽이 드러나리라 믿었다. 정의는 조금 더디더라도 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벌써 꽃망울이 맺히는 이즈음에도 헌법재판소는 너무 조용하다. ‘그곳’이 너무 조용하니 세상은 시끄럽다. 귀가 아프다. 나는 저 침묵이 낯설지 않다. 수상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수없이 속아왔고, 수없이 꺾여왔다. 하지만 조용하다는 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런 믿음조차 없다면 나는 이 봄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볕보다는 자꾸만 그림자를 향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힘겹게 견딜 수 있는 것은 꽃샘에도 불구하고 봄은 어김없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게 ..

민예총 총회를 다녀왔다. 30년 된 조직치고는 무척 소박한 규모의 총회였다. 대체로 토론보다는 보고와 박수로 안건들을 통과시켰다. 뒤풀이를 위해서 빨리 끝내려는 집행부와 참석자들의 생각이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어떤 때는 요식 절차를 생략하고 차라리 뒤풀이에서 회포를 풀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눈 게 더욱 생산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리고 오늘의 ‘빨리빨리’는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함과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추인해야 하는 불편함, 봐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숫자와 통계들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시각장애인 손 시인을 데리고 뒤풀이 장소인 ‘갈매기’로 가다가 후배 종찬의 전시를 구경하러 왔던 보운 형의 전화를 받았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보운..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부드러운 봄바람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온다. 긴 겨울을 견디느라 닫아두었던 감정들이 그 바람의 촉감 하나에 순식간에 해동된다. 봄밤은 늘 그렇게 나를 무장 해제시킨다.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은데도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낮 동안은 사람들 속에 묻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다가도, 밤이 오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이 시리다. 봄이 오는 걸 나는 눈으로 먼저 알기보다, 가슴으로 먼저 알아챈다. 낮은 여전히 미세먼지 자주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분명히 다른 빛깔이 감돌고, 길가의 나무들 끝에서는 희미한 연둣빛이 꿈틀댄다. 하지만 그런 변화보다 더 먼저, 나는 밤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어둠이 덜 외로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고요한 얼..

주방 청소를 하다가 썩은 감자 뭉치를 발견했다. 표면에 하얀 싹들이 송곳니처럼 박혀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썩어가면서도 새 생명을 품은 감자는 마치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이야기들의 잔해 같았다. 한편, 배달된 라면을 정리하다가 싱크대 찬장 안에서 녹슨 주전자를 꺼냈다. 아랫면에 달라붙은 물때가 마치 옛 해도의 지도 같았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앞치마 포켓 속에 명함이 들어있었다. 어제 무심코 버렸다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뒤져 다시 꺼내 넣어두었던 명함이었다. 이 명함은 버려지진 않았으나 잊힐 게 뻔하다. 하지만 다시 꺼낸 것만으로도, 나는 무언가 도리를 다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장 사이에서 빛바랜 고속버스표가 발견되..

그저께부터 우리 집에서 머물던 큰누나는 밤일을 마치고 집에 들른 작은누나와 다투고 “내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불편해지나 봐”라며 돌아갔다. “그럼, 택시나 잡아 줘” 하는 큰누나에게 작은누나는 “어플 깐 다음 택시 부르면 되잖아. 애야? 그것도 못해?” 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큰누나는 얼굴이 빨개져 현관을 나갔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누나들, 특히 큰누나는 당분간 내 집에 들르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는 서로의 몸이 닿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닿지 않는 게 더 두려워서 안절부절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사소한 다툼으로 마치 낯선 타인들처럼 돌아서고 후회한다. 현실적인 작은누나와 공주처럼 보호받고 싶어 하는 큰누나가 부딪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은 다툰 후의 어색함을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