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상상력이 자꾸만 나를 떠나네 (3-20-목, 맑음) 본문
주방 청소를 하다가 썩은 감자 뭉치를 발견했다. 표면에 하얀 싹들이 송곳니처럼 박혀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보니 느낌이 이상했다. 썩어가면서도 새 생명을 품은 감자는 마치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이야기들의 잔해 같았다. 한편, 배달된 라면을 정리하다가 싱크대 찬장 안에서 녹슨 주전자를 꺼냈다. 아랫면에 달라붙은 물때가 마치 옛 해도의 지도 같았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앞치마 포켓 속에 명함이 들어있었다. 어제 무심코 버렸다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뒤져 다시 꺼내 넣어두었던 명함이었다. 이 명함은 버려지진 않았으나 잊힐 게 뻔하다. 하지만 다시 꺼낸 것만으로도, 나는 무언가 도리를 다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장 사이에서 빛바랜 고속버스표가 발견되었다. 5년도 더 된 고속버스표였다. 그건 친구 모친을 문상하러 공주에 있는 장례식장에 내려갈 때 끊었던 표였다. 하늘에 드신 지 이미 오래인 친구의 모친은 그래서 잠깐 나에게 기억되었다. 가끔 이런 경험을 한다. 문득 발견한 어떤 사물에서 잊힌 기억을 더듬어 내는 일, 이를테면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지우개에서 옛날 내가 몰래 적어둔 문장 조각을 발견하는 일 같은……. 거기에는 “파란색 거울에 핀 상상의 꽃”이라는 글자들이 지우개의 검댕과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지우개에 적혀 있던 말과는 달리, 충만했던 상상력이 하루가 다르게 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천금을 잃은 것보다 가슴이 메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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