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마치 낯선 타인처럼 (3-19-수, 맑음) 본문

일상

마치 낯선 타인처럼 (3-19-수, 맑음)

달빛사랑 2025. 3. 19. 23:41

 

그저께부터 우리 집에서 머물던 큰누나는 밤일을 마치고 집에 들른 작은누나와 다투고 “내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불편해지나 봐”라며 돌아갔다. “그럼, 택시나 잡아 줘” 하는 큰누나에게 작은누나는  “어플 깐 다음 택시 부르면 되잖아. 애야? 그것도 못해?” 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큰누나는 얼굴이 빨개져 현관을 나갔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누나들, 특히 큰누나는 당분간 내 집에 들르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는 서로의 몸이 닿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닿지 않는 게 더 두려워서 안절부절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사소한 다툼으로 마치 낯선 타인들처럼 돌아서고 후회한다. 현실적인 작은누나와 공주처럼 보호받고 싶어 하는 큰누나가 부딪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은 다툰 후의 어색함을 오래 가져가지 않고 이내 풀어버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뭔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서 나는 그녀들보다 훨씬 더 어색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걸 알기나 알까? 누나들이 돌아간 후 한참을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꽃샘추위의 기세가 아직은 이곳에 남아 있어 문을 열면 찬바람이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낡은 스웨터 구멍으로 3월의 바늘이 실을 풀어내고 있던 오후, 추위로 얼룩진 테라스 철문 앞 화단에 붙어두었던 튤립 뿌리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옆집 옥상에서는 빨랫줄에 걸린 양말과 티셔츠들이 앞뒤로 흔들리며 오후 3시 17분의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집 1층, 미장원 유리창에 비친 오후의 해는 내가 어릴 적 땅속에 파묻었던 유리구슬 속 무지개 같은 몽환적인 빛을 잠깐 보이더니 이내 교회당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빛이 그늘로 바뀌는 그 짧은 순간 나도 잠깐 쓸쓸해졌다. 충전을 마친 휴대전화 액정에 불이 들어오자 읽지 않은 문자와 알람 표시가 전자레인지에서 미처 꺼내지 않은 찬밥처럼 뭉쳐 있었다. 나와 누나들이 유년의 눈사람 속에 꽂아두었던 소나무 가지가 이제야 겨우 싹을 틔우려는 수요일 오후, 누나의 머리카락에 걸려 실뜨기 놀이하던 봄바람은 우리를 삼킨 시간의 목화씨들을 툭툭 터뜨리고 있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