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그는 결국 그 섬을 나왔다 (5-26-월, 맑음) 본문
오늘도 좋은 날씨였다. 기온은 어제보다 조금 올랐고 미세먼지 상태는 ‘보통’이었다. 하지만 시계(視界)는 어제보다 나빴다. 청사 옥상에서 바라본 문화예술회관과 롯데백화점이 뿌연 박무(薄霧)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점심은 사무실 선배들과 오랜만에 청사 밖에서 먹었다. 메뉴는 김치찌개, 김 목사님이 선택했다. 사실 출근해서는 (점심 메뉴로) 김치찌개를 자주 먹지 않는다. 집에서도 자주 먹는 음식이라서 가급적 집 밖에서는 다른 걸 먹는 편이다. 하지만 얼마 전 점심때,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는 김 목사님의 제안에 내가 “김치찌개 말고 돼지국밥 먹으러 가면 안 될까요?”라고 역제안했고, 보운 형도 동의해 돼지국밥을 먹었던 터라서 오늘은 거절할 수 없었다.
오전 10시쯤, 옥상에 올라가 지난주 섬에 들어갔던 후배 장(張)에게 전화했다. 지난 주말 그에게 온 전화를 ‘씹은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한 달에 400만 원을 받고, 약 2개월간 방조제 공사장 인부들의 3끼 식사를 만들어 주는 조건으로 (선갑도에서 다시 개인 소유의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무인도에 들어간 그였기에, 그의 섬에서의 하루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그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는 배 위에서 자고 있었는지 약간 졸음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 난 지금 섬에서 나가는 중이에요.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가 봐요. 이 섬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심지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가 꿈에 무녀복을 입고 나타나질 않나……. 얼마나 섬뜩했는지…….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도 빨리 나오라고 하고……. 그래서 지금 나가는 중이에요. 연안부두까지 세 시간 정도 걸리니까 도착해서 다시 전화할게요”
그래,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세 가구 정도밖에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홀로 밤을 보내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장 인부들은 하루분의 작업이 끝나면 배를 타고 선갑도로 나갔다가 이튿날 작업시간에 맞춰 들어오기 때문에, 후배는 매일 밤 홀로 빈집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한다. 아무리 간 큰 사람이라도 무인도의 밤은 무서웠을 것이다. 처음 들어간 날에는 경치가 좋다느니, 읽을 책과 시작 노트를 가지고 들어와서 그야말로 혼자 공부하는 느낌이라느니, 바다를 보노라면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다느니 하며 별별 너스레를 다 떨었다. 하지만 채 열흘을 못 넘기고 섬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비 오는 토요일, 카페 ‘산’에서 혁재를 만났을 때, “삼시세끼를 준비하는 거, 그거 만만한 일이 아닐 텐데……. 아침 먹고 나면 점심 돌아오고 점심 먹고 나면 금방 저녁 돌아오고……. 말로는 명상하고 시 공부하다 나올 거라고 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있을까?”라고 그(혁재)에게 물었더니, 혁재도 “아이, 그거 쉬운 일 아니에요” 하며, 장이 밝힌 섬 생활(인부들의 세 끼 식사를 준비하고, 책 읽고 시 쓰고, 명상하기 등) 계획을 미심쩍어했다. 혁재는 “나라면 가능하지만”이라며 킬킬거리긴 했지만, 우리의 우려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대로 결국 장은 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뭍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행자가 아니라면 벌레 우는 소리와 산짐승 소리, 든바다의 파도 소리 이외에 모든 소리가 절멸된 절대고독의 시공간에서 홀로 마주하는 어둠은 어쩌면 존재의 영혼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도시의 온갖 소음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마음의 준비 없이 덜컥 무인도의 어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는 무인도의 적막함과 한밤중의 적요, 어둠의 무게를 너무 감상적으로 파악하고, 신파적으로 반응했던 게 틀림없다.
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 그가 현실을 표피적으로만 파악할 때의 위험성, 자신의 감정에 자신이 속을 수도 있다는 사실, 자연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때로 그악스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잃는 게 있으면 또 그만큼 얻는 것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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