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비 내리는 밤에 문득 (5-23-금, 밤부터 비) 본문
한낮에는 날이 맑았는데, 오후가 되면서 점점 흐려지더니 저녁 무렵에는 비가 내렸다. 여름을 향해 달리는 비답다고 느꼈다. 그게(‘여름을 향해 달린다는 것’) 어떤 느낌(혹은 의미)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테라스에서 비를 보는 순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최근 나는 특정한 현상에 관한 나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겠다. ‘사소한 모든 것까지 설명이 필요한 세상에서 평생 살아왔는데도 그렇다는 건 내 삶에 모종의 변화가 찾아온 탓일 것이다’라고 생각할 뿐이다.
오전에 채소 사러 갈 때는 날이 좋았다. 살짝 더웠지만,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바람은 초여름 밤비(night rain)의 전초병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저녁에 비의 본대(本隊)를 몰고 이곳에 다시 왔을 때 나는 알았다. 나는 내 피부가 느끼는 기시감을 믿는 편이다. 아무튼 오이가 천 원에 세 개였지만, 지난주보다 크기가 두 배는 커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하는 내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보다 명민한 김수영 시인도 사소한 것에 분노하며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라고 자조했으니...... 사실 자조는 시인의 상투적인 엄살이다.
밤비를 무심히 쳐다보다가 비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집을 나섰다. 보슬비가 내렸으나 우산을 가지러 다시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연락도 없이 카페 ‘산’을 찾았다. 목표한 건 아니지만, 딱히 갈 데도 달리 없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금요일 밤이었지만, 손님은 두 명밖에 없었고 그중 한 명은 혁재였다. 나를 본 혁재는 놀란 표정으로 “성식이 형이 전화했어요?” 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아니야. 비 오길래 나왔다가 그냥 들렀어” 대답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던 혁재는 옆자리 손님과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예술에 관한 자기 생각을 피력하고 있었는데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그야말로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옆자리 손님은 무얼 알겠다는 건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인 성식은 “오셨어요?” 하고 내게 인사한 후, 무거운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음악만 듣고 있었다. 애인(카페 일을 도와주기도 하는) J와 심하게 다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서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소주를 홀짝거리며 음악을 들었다. J가 없는 탓에 성식은 서비스 안주로 나가는 딱딱한 과자 한 접시를 안주로 내놓았다. 입에 맞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혁재에게 초콜릿과 소금을 달라고 했다.
혁재와 대화하던 손님이 돌아가자, 성식은 “형, 저녁이나 먹어요. 배고프네요” 하며 혁재와 나를 카페 맞은편 고깃집으로 안내했다. 배불리 저녁을 먹었는데도 고기와 냉면을 보는 순간 입맛이 당겼다. 열량과 혈당이 걱정됐지만, '매일 이런 것도 아니잖아'라고 합리화했다. 자제력이 식욕 앞에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비 내리는 밤에 먹는 소주와 돼지고기 구이는 정말 맛있었다. 식당에서는 내내 혁재 혼자 말하다 웃었고, 그런 그에게 성식은 “좀 닥치고 고기나 먹어”라고 지청구했다.
식당에서 나오니 빗줄기가 거세졌다. 성식은 “형, 나는 가게에서 술 한 잔 더 하고 갈게요” 하며 카페로 되돌아갔고, 그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아 나는 이후 일정을 고민하며 잠시 혁재와 식당 앞에 서 있었다. 혁재는 내심 한잔 더했으면 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배가 불러 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말이 없자, 혁재는 “오늘은 만석동 안 가고 문학동 가서 큰엄마 젖 만지며 잘 거예요” 하며 크게 웃었다. 비는 더욱 많이 내렸다. 식당에 다시 들어가 비닐우산 하나를 빌렸다.
혁재와 둘이서 우산을 쓰고 대로 쪽으로 걸어나와 택시를 기다렸다. 잠시 후 택시가 도착해 혁재를 보내주고 나는 집까지 걸어왔다. 비 내리는 밤거리를 걷는 게 너무 좋았다. 집에 도착하니 온몸이 비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옷을 벗어 세탁기 넣고,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오늘 하루 중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말리며 ‘그럼 된 거지 뭐’ 하고 생각했다. 비가 오니 이런 날도 만든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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