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민주화센터자문회의 ❚ 혁재의 겨울 (2-13-목, 맑음) 본문
오전에 인천 민주화센터 자문위원회 회의에 다녀왔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여는 회의라서 그런지 평소와는 다르게 자문위원 10명이 모두 참석했다. 24년도 사업 결과 보고와 신년에 새로 추가된 사업 계획을 심의했다. 확실히 사람이 많다 보니 의견도 많았다. 의견 중에서 방통대 유 교수가 제안한 장노년층 민주 인권 교육에 관해 크게 공감했다.
은퇴 후 현직에서 물러난 60대들은 갑작스러운 무직 생활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고, 골프나 음주, 등산 등 단순 취미생활만으로 자신의 남을 삶을 소진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이 많다. 나야 현재도 일하고 있고 나의 ‘주특기’ 자체가 문학과 예술이기에 특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고위공직자 출신이거나 대기업 임원이었던 내 친구들은 한결같이 같은 고민을 호소한다.
그래서 은퇴 직후에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등산, 골프, 동호회 등 취미 모임에 자주 나가 은퇴 후의 허허로움을 달래보지만, 길어야 6개월에서 1년만 지나면 모든 게 시들해지고 일과 가족만 보며 달려온 자신의 늙어가는 삶에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회한이 밀려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 친구들 상당수는 그런 서글픔을 모두 느껴 봤거나 현재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다. 경제적 여유와는 상관없었다.
아침 7시면 식사하고 집을 나서는 생활을 수십 년 하다가 어느 날 느지막이 일어났는데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평소처럼 일어나 식사를 마쳤으나 이제는 딱히 갈 곳이 없어 그저 공원이나 산책하고 집에 돌아와 유튜브나 텔레비전 영상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임에도 나가고 고정적인 취미도 갖게 되었으나 은퇴 직후에는 정말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다른 위원들도 모두 공감해 앞으로 민주화센터의 교육 과정에 장노년층 교육 과정도 새로 첨가할 것을 고민해 보기로 했다.
또 하나 공감했던 이야기는 센터에서 하는 사업 중에 민주인사들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내는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일명 구술 아카이브 사업인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문제는 현재 생존해 있는 인사들을 인터뷰할 경우, 특정 시기 사업이나 사건에 대해 기억의 조작이나 혼동, 자의적 판단 등이 개입될 수 있으므로 이 문제를 극소화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다시 말해서, 민주화운동 선배가 구술하고 그것을 그대로 책으로 엮어내는 현재와 같은 방식에서는 해당 선배가 한 말이 검증되지 않은 채 역사적 사실로 박제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같은 시기, 유사한 활동을 전개한 선배들을 함께 인터뷰하여 교차 검증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 이야기에도 많은 위원이 공감했고, 센터에서도 그 보완책을 마련해서 다음 회차 회의에서 보고하겠다고 정리했다.
회의 마치고 해장국집에 들러 모두 함께 식사하고 청사로 돌아왔다. 4시쯤 장은준이 전화해서 혁재네 동네에 있는 단골 회 포차로 혁재 만나러 간다며 나도 오라고 했다. 일단 근무 중이어서 끝나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나저나 혁재가 집에 콕 틀어박혀 있을 사람이 아닌데 며칠 동안 계속 집에서 나오지 않는 걸 보면 혁재 어머님이 상태가 여전히 안 좋은 모양이다. 가령 오늘처럼 은준이 만나자고 전화했을 때, 멀리 갈 수는 없으니 집 앞에서 보기로 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혁재가 툴툴거리긴 하지만, 모친 옆에 붙어서 수발하고 (반찬 만들고 죽 끓이고 말벗 되어 주고) 밤에 함께 잠을 잔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혁재나 모친이나 이 겨울을 잘 통과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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