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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내게 온 두 권의 시집 (2-11-화, 맑음) 본문

일상

내게 온 두 권의 시집 (2-11-화, 맑음)

달빛사랑 2025. 2. 12. 12:14

 

황정현 시인의 시집 『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파란, 2024)을 읽고 난 후의 (지극히 주관적인) 제 느낌은 ‘조금 비켜서서 세상에 말 걸기’와 ‘나는 당신과 내가 무척 닮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랑하고 연민합니다’였습니다. '조금 비켜서서'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고 연민하는 이유는 수줍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겁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고, 순수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사춘기 시절 짝사랑 상대를 대하는 소녀(소년)처럼 누구보다 절실하고 진지한 마음이지만 대놓고 고백하지는 못하고 일기장에 그 사랑을 소중하게 기록하는 애틋한 마음 같은, 그런 시들. 나는 황정현 시인의 시들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비롯한 현실의 안타까운 죽음과 비현실적 이별에 관한 시인의 ‘레퀴엠’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슬픔을 대하고 갈무리하는 시인의 방식과 진정성에 공감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겨울, 황정현 시인의 시들을 읽으며, 젠체하는 겨울바람의 휘파람 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의 휘파람 소리가 커질수록 봄은 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걸 믿습니다.

 

❚나무요일

 

혼자 걷는 나무가 될게

기다리지 않아도 만날 수 있게

헤어지지 않고도 다툴 수 있게

긴긴 목덜미를 쓰다듬을게

마른 손가락으로 빗방울을 쓸어 담을게

바람의 목을 쥐고 길어지는 그늘이 될게

구름을 써 볼게

너처럼 보일 수 있게

때론 공기인형처럼 흔들릴게

빈속을 혼잣말로 채울 수 있게

열두 시 방향으로 팔을 모을게

오늘은 내일처럼 슬프지 않게

가끔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을게

오래오래 참는다는 게

눈부시도록

세 시와 사십 분의 각도로 다리를 벌릴게

텀블러와 생각이 잠시 쉴 수 있도록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들게

꿈속에서도 너처럼 흐를 수 있게

꿈에서 깨도 뭉클할 수 있게

다음 요일엔 흰 종이로

쌓여 있을게 ❙황정현, 「나무요일」 전문

 

 

강성남 시인의 시집 『당신과 듣는 와인춤』(북인, 2024)은 총 4부로 이루어졌는데, 각 부(部)의 제목을 와인의 종류(스위트, 레드, 로제, 화이트)로 붙인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와인들이 4계절과도 연관되어 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구성상으로 본다면 지금은 겨울,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시간입니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제가 느낀 주된 정서는 애잔함과 그리움입니다. 그 애잔함과 그리움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몇몇 시어로 인해 환기되는 게 아니라 보다 원형질적으로 시 전반을 대기처럼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아마도 시인의 정서를 만들어준 유년의 삶(과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도 잊고 있던 유년의 추억과, 자신이 사랑했(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주 가슴이 먹먹해질 겁니다. 또한 만만찮은 시력(詩歷)에서 비롯한 다채롭고 신선한 비유들을 통해 ‘읽는 즐거움’도 느끼게 될 거예요.

이 겨울, 화이트 와인처럼 매혹적이고 향기로운 시들을 보내준 시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나비

 

 엄마는 나를 꼭꼭 접어 봄 속으로 내보냈다

 

 괴어놓은 돌이 자주 흔들리는 정릉동 산허리, 새 교실 맨 앞자리엔 고향에 두고온 책상이 따라와 있었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 앞에서 내리면 종로소방서가 보일 거야 청진약국을 끼고 한옥 담장을 따라가 서울 지리에 깜깜한 나는 아담한 ‘아담’이라는 요정을 용케 찾았다 커다란 나무 대문 안에 연못, 수면에서 반짝이던 물비늘이 일제히 나를 비추었다 마루엔 속저고리만 걸친 여자들이 화투를 치고 세상의 꽃들은 모두 모여 피고 있었다 주인 마담은 내 이름을 안다고 빳빳한 지폐 한 장을 쥐여주었다 진홍색 모란처럼 온몸이 물들어 나오는 내 귀엔 드르륵 장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열세 살 분홍 원피스엔 자꾸만 꽃가루가 달라붙었다

 

봄이 그려준 약도 한 장 들고, 봄 속의 봄을 건너고 있다 ❙강성남, 「나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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