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늙은 개처럼 보낸 하루 (2-14-금, 박무) 본문
어제는 혁재와 은준을 만나 제법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일단 내가 퇴근해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둘이 막걸리를 다섯 병이나 마신 상태였다. 물론 둘 다 주량들이 세서 그 정도로는 취하진 않았다. 늘 가는 단골 포장마차에는 오늘따라 먹을 만한 안주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바깥양반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와야 해산물을 가져와 파는 곳인데 오늘은 바람이 세서 바다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회로 먹을 수 있는 안주는 없었고 마른 해물과 매운탕거리들만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가오리찜을 먹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무척 담백하고 맛있었다. 회가 먹고 싶었으나 가오리찜과 시금칫국도 안주로서는 괜찮았다. 하지만 혁재가 어머니 저녁을 챙겨줘야 해서 일단 6시에 그 집을 나와 (혁재는 집에 가고 나와 은준은) 근처 횟집에 들어갔다. 규모는 무척 크고 가게도 깔끔했으나 손님이 우리밖에 없어 썰렁했다. 혁재가 올 동안 은준과 둘이 우럭 광어 세트에 소주를 마셨다. 어머니 저녁을 차려준 혁재는 6시 50분쯤에 다시 우리와 함께했다. 혁재가 없는 동안 은준과는 주로 시 쓰기와 관련한 대화를 나눴다. 은준은 요즘 비로소 시 쓰기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습작기 시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서 나는 은준에게 지금 그 마음의 상태를 잘 기억해 두라고 말해주었다. 진짜 그런 거지 술기운에 너스레를 떤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가 시에 기울이는 노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왜 그런지 모르게 술을 섞어 마신 다음날에는 항상 속이 메슥거린다. 안주를 제대로 먹지 않고 술을 마셔서 그런 걸까, 요즘 자주 구토를 한다. 그래 봐야 위액만 나오는데, 다행히 그렇게 토하고 나면 속이 편해진다. 오늘 아침에도 속이 불편해서 일찍 깼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그러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보통 아침을 먹지 않는데 속을 게워 내서 그런지 해장하고 싶어졌다. 결국 ‘둥지 냉면’ 한 봉지를 끓인 후 오이와 숙주를 넣어 먹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들어가지 않아, ‘그냥 뜨거운 라면을 끓여 먹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두어 젓가락 뜨니까 비로소 속에서 받았다. 먹고 나니 좋았다. 다만 종일 폐인 모드가 되어 침대에 누운 채 하루를 보냈다.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컨디션이 회복되어 제대로 한 끼를 만들어 먹고 운동도 한 시간 했다. 그래도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운동해야 한다는 걸 몸과 마음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고마웠다. 오늘 넷플릭스에서 영화만 3편(‘달콤한 이곳’, ‘날벼락 웨딩’, ‘허니문 불청객’) 봤다. 골치 아프지 말라고 로맨스 영화만 봤다. 아주 빼어난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당연히 썩 좋은 시간 활용 방식은 아니나 가끔 오늘처럼 늙은 개처럼 늘어져서 보고 싶은 영화만 보며 하루를 망가뜨려 보는(?) 것도 정신 건강에 꽤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자주 그러면 몹쓸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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