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바람의 내력, 혹은 불면의 이력 본문
나에게만 불어오는 바람은 아니었다. 발밑에 떨어져 구르던 수백 개의 별, 멍든 달, 말하던 꽃들 위로도 바람은 불었다. 아니다. 바람이 불자 그것들이 떨어지고 구르고 말하기 시작한 건가. 확실하진 않다. 눈 밑의 새로 생긴 점과 이마의 주름살이 신경 쓰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늘 만나왔던 누군가에게 갑자기 관심이 생겼고, 그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던 밤에도 바람은 불었다. 나의 하루는 길어졌거나 짧아졌거나, 가늠하기 어려워진 것만은 분명하다. 시력이 약해졌다. 나빠진 게 아니라 약해졌다. 컨디션에 따라 편차가 크다. 최근, 똑똑히 바라보면 확실히 절망할 게 분명한 일이 많아진 모양이다. 세상이 강퍅해질수록 희한하게 내 시력은 약해지곤 했으니.....
엊그제 놓친, 아니, 일부러 풀어 놨었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내 말들을 찾으러 다시 그곳에 갔다. 나의 말들과 너의 말들은 뒤엉켜 어느 것이 내 말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주로 모나고 예리한 말들을 주워 담다 보니 네게 상처가 됐을 게 분명한 그 말들이 오늘은 서슴없이 나를 벤다. 핏물이 선연하다. 그날 생각보다 멀쩡한 너를 보며 나는 안심했는데, 그래서였을까. 풀어놓은 말들을 자루에 담아 가져와 보니 더러는 이미 자루를 찢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고, 그런데 그건 너의 말이었을까, 나를 버린 말이었을까, 남은 말들조차 꽂꽂히 고개를 세운 채 나를 향해 직립해 있더라는..... 네 말보다는 내 말들이 날래고 날카로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로부터 벗어나 애초에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나를 문다. 너를 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를 물고 나를 벤 그 모든 말들은 이제 내것이 아닌 것처럼 의뭉을 떤다. 하지만 그럴 리가....나를 벗어난 말들은 빠르게 빠르게 새끼를 치고, 인간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게 내 말과 섞여 온 너의 말들도 무럭무럭 자라서, 금방 쑥쑥 자라서 마음속에 미늘처럼 박혀 빠지지 않는다. 생각해 봐. 너라면, 아니 너라도 너의 말을 잡아두진 못했을 걸. 사실 너의 말들도 예사롭진 않았잖아. 나는 말 장수가 되어야 할까 봐. 말 부자가 되었거든.
세상에 역병이 창궐하니 잠자는 신의 침실 앞에는 이유 있는 아우성들. 비 내리니 문득 생각난다. 얼마 전 들렀던 배다리. 연극하는 후배는 장사가 안 되는 술집 사장이 되어 무대장치 같은 탁자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었다. 때때로 효과음 같은 자동차 경적이 문밖에서 울렸다. 단역배우 같은 손님들 서넛 들어와 소품 같은 술과 안주를 먹고 가기도 했지만, 그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전면 유리창 밖으로 성채처럼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는 저녁해의 마지막 빛을 받아 잠깐 반짝이던 아파트 유리창이 후배의 눈빛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연애까지는 아니고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고 말을 했지만 사실 그는 사랑하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바이러스 지극할 때 망설이던 전화를 했다고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받지 않았다고..... 얼마 전 그녀의 말, 심각한 건 싫어요. 하지만 가볍게 만나는 건 상관없어요. 밥 먹을 때 수저 밑에 냅킨을 조심스레 놔주고 물도 먼저 따라서 슬쩍 밀어놓곤 했는데. 우산 밑에서 그의 한쪽 어깨는 늘 젖어 있었다고. 추운 날 장갑도 슬며시 벗어준 거 정말 기억 안 난단 말이야. 숙제도 해주고 술자리 흑기사도 여러 번인데, 심각한 건 싫다니 말도 안 돼. 여름밤에 빚진 것도 없는데 자꾸만 가슴이 떨려. 먼 곳으로부터 외상장부는 자꾸만 도착하고.
새벽 세 시의 벽은 점액질이다. 끈적한 젤리가 잔뜩 묻은 팔 하나 불쑥 튀어나온다. 머리가 나오고 무릎이 빠져나오고 마침내 발이 빠져나온다. 양말이 벗겨진다. 잠든 나를 내려보며 한참을 놀다가 어둠이 옅어질 때쯤 젤이 말라붙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물거리고 돌아간다. 가끔 벽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다. 그를 따라서 나도 벽속으로 들어갈 때도 있지만 들어가는 순간 기억을 잃는다.
지난밤 별들에게 눈인사를 보냈을 때 가장 밝은 별 하나가 내게 말했다. “아이쿠, 들켰군요. 이럴 줄 알았다면 꽃으로 갔을 거예요.”
인간의 몸은 물 35ℓ, 탄소 30㎏, 암모니아 4ℓ, 석회 1.5kg, 인 800g, 염분 250g, 질산칼륨 100g, 유황 80g, 불소 7.5g, 철 5g, 규소 3g, 기타 소량의 15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집게벌레를 손바닥으로 탁! 내리쳐 죽였다. 벌레도 나를 보았을까. 아마 보았을 거다. 느린 속도로 기어가던 그것이 갑자기 속도를 냈고 몸통 끝 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집게를 들어 올리며 나를 위협했으니까. 잠깐, 위협? 위협이라고? 아니다. 혐오감이다. 살충제나 휴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몇만 배나 큰 내가 몇만 분의 1밖에 안 되는 집게벌레를 손바닥으로 탁! 내리친 것은 순전히 혐오 때문이다. 혐오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한다. 집게벌레가 만약 무당벌레처럼 예쁘고 윤기나는 등딱지를 가졌어도 나는 그것을 죽였을까. 아마 살려줬을 거다. 두려움은 오히려 벌레의 몫, 그 두려움에서 비롯된 본능적이거나 조건반사적인 움직임이 나의 혐오도 촉발했다. 도발로 보였다. 나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내려쳤다. 혐오스러웠으니까.... 그것이 나와 더불어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므로, 나에게 본질적 적대가 아닌 본능적 적대를 보인 그것을 죽였다. 탁! 내리쳐서 죽였다. 벌레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두 동강 났다. 잘린 몸통 중 머리가 붙어 있던 부분이 꿈틀, 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휴지를 꺼내 그것을 짚었다. 휴지에 감싸쥐고도 힘을 주었다. 가루처럼 그것은 으깨졌을 것이다. 새벽, 평온한 주방에서 살풍경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예민한 냉장고와 화가 많은 가스렌지, 샤워를 마친 채 말라가던 그릇조차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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