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시는 매번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본문
날이 부쩍 더워졌다. 오늘 인천의 최고기온은 32도. 점심 먹으러 단골식당에 들어갔더니 에어컨과 선풍기가 연신 돌아갔다. 생각보다 서늘했다. 실내의 모습은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순댓국을 먹고 좀 걷다가 노점 카페에서 과일주스를 주문했다. 수박을 먹고 싶었으나 메뉴에 없어서 당근과 사과를 함께 갈아 넣은 주스를 마셨다. 밖에서 마시려고 하다가 하도 더워서 실내로 들어갔다. 창문이 없어 어두컴컴했지만 더운 것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주스를 마시며 보좌관들과 요즘 집값과 전세 시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교사 경력 20년 이상인 그들은 모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박 모는 시골에 전원주택도 있었다. 퇴직 후 받게 될 공무원 연금도 300만 원이 넘었다. 내가 전셋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니까 이러저러한 질문을 했는데, 그들은 구체적 시세를 모르고 있는 거 같았다. 하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그들이 월세나 전세에 대해 평소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을 테니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젯밤 아파트값과 전세 시세를 알아보다가 기함하고 말았다. 최근 사이에 너무 많이 올랐다. 교육청 앞 신축 원룸(8~10평)의 전셋값이 8천에서 1억이었다. 평당 천만 원이라는 말인데, 기가 막혔다. 지난번 LH 직원들의 짬짜미나 조국 전 민정수석 자녀의 입시 특혜 의혹에 대해 젊은이들이 절망을 넘어 분개한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월급을 쓰지 않고 꼬박 20년을 모아야만 서울에 있는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젊은이들은 저축은커녕 취업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조차 예삿일이 아니다. 출발점이 다른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노력하면 된다는 부질없는 믿음으로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자 노력해 온 그들에게 권력과 금력이 조장한 불평등 불균등한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믿어온 신념과, 속을 줄 알면서도 현실에 대한 주문처럼 지녀온 마음속 신화를 깨뜨리는 일이었을 테니까. 어젯밤 아파트를 검색하고 난 후 나는 당분간 이 집을 떠나지 못할 거라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물론 지금 사는 집도 나에게는 과분하다. 큰 방이 세 개나 되고 전철역 근처라서 교통도 편리하다. 단독주택이라서 층간소음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침저녁으로 불편하게 마주치는 이웃들도 없다. 다만 내 집이 아니라는 게 문제일 뿐.
몇 년 전 큰일이 있기 전, 나도 넓고 쾌적한 아파트를 소유한 적이 있었다. 50평대였고 입지도 좋아 마을에서의 평판도 좋은 아파트였다. 하지만 정작 그때는 집을 비롯한 부동산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승용차도 대형이었고 평수도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어렵게 사는 내 운동권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품고는 있었지만……. 그때 집 없는 동료들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혹시 나도 모르게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나? 강남 부자들이 알면 코웃음을 칠 일이겠지만, 알량한 부를 과시했던 건 아닐까? 내 기억으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모르겠다. 기억의 선택에도 주관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법일 테니까. 아무튼, 장담할 순 없지만, 앞으로도 나는 과도하게 집에 집착하며 살진 않을 생각이다. 재밌는 일, 해보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수억 원의 돈을 집에 묶어놓고 산단 말인가. 물론 집값이 오르면 재산도 증식되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내 삶의 남은 날이 너무 아깝다. 도시의 유목민처럼 단출한 살림으로 이곳저곳 새집만 골라 살아보는 것도 재미나는 일 아닌가?
동료들과 점심 먹고 차 마시는 자리에서 우연히 최근 아파트값과 전세 이야기가 나왔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내심 씁쓸했다. “정상이 아니에요. 미친 세상이에요.”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남과 비교하면 슬퍼진다. 하지만 비교하지 않고 사는 일은 웬만한 내공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삶을 살려면 일정한 수행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찬란한 자본의 총화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유혹하는 현실에서 자신만의 본류를 지키며 좌고우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도 ‘아홉 켤레의 구두’는 있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맞는 벗이 있으며, 무엇보다 늘 나를 긴장시키는 시가 있다. 나는 그 시를 읽고, 쓴다. 이건 좀 잘난 체하려고 한다. 내 ‘아홉 켤레’의 구두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한 켤레니까. 나는 자주 시를 빛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시는 매번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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