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발인 (2021-01-10, 일요일, 맑음) 본문
아침 7시 30분, 엄마는 안치실을 나와 영구차에 올랐다. 운구는 교회 상조회에서 맡아주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종교행사가 금지되어 젊은 목사는 간단한 성경 구절과 기도로 발인예배를 대신했다. 20여 분 후 승화원에 도착한 엄마는 접수를 마친 8시 30분 조카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화로 입구로 운구되었다. 2번 화로 앞 유족대기실 전광판에 엄마의 이름이 떴다. 유리 너머에서 직원은 화로의 캐비닛을 닫기 전 손짓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우리에게 알렸다. 이윽고 돌아서서는 롤러를 타고 화로 깊숙이 빨려들 듯 이동하는 엄마의 관을 보며 직원은 거수 경례를 했다. 문이 닫히자 동생이 큰 소리로 오열했고 “할머니!” 하며 아들이 오열했다. 나는 장지까지 따라와 준 지인들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엄마 생전에는 죽음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메어오고 눈물이 핑 돌았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니 엄마가 서운해할 정도로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늘 함께 생활해 온 사람이고 마지막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화장은 꼬박 1시간 40분이 걸렸다. 수골실로 옮겨진 엄마의 유해는 미리 준비해 둔 유골함에 담겼다. 유골함의 3분의 1도 채우지 못하는 양의 유해가 엄마의 90년 삶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허망했다. 유골함을 넘겨받아 진공포장을 하고 보자기에 감쌌다. 차디찼던 유골함이 엄마의 온기로 따뜻했다.
승화원을 나온 가족들은 영구차를 타고 2백 미터 아래에 있는 가족 묘역으로 내려갔다. 인부들이 나와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장비를 이용해 납골함의 대리석 상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눈 때문에 가족들도 인부들도 자주 미끄러져 위태로워 보였다. 11시 30분, 엄마의 유해는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였다. 상판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엄마의 영혼을 위해 일제히 묵념했다. 병원으로 돌아와 상복을 반납한 후 인근 식당에서 식사하려고 했으나 4인 이상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많지 않아 할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주는 마지막 용돈이야.”라고 하며 고생한 아이들에게 20만 원씩 용돈을 주었고, 누나들과 동생에게 3백만 원씩 나눠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 방의 문을 열어보았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엄마만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왔다. 비행기 시간에 여유가 있어 잠깐 집에 들른 부산 조카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장례 과정 내내 느껴지지 않던 허기가 갑자기 느껴졌다. 조카가 떠난 후, 나는 “엄마, 엄마!” 부르며 집안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슬픔보다는 미안함과 미련이 훨씬 강했다.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내 방으로 들어와 빨래처럼 널브러졌다. 서너 시간 꿀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날이 조금 풀리고 햇볕이 너무 투명해서 고맙고 다행이었다. 엄마 없는 빈집에서 잠을 자는 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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