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한 도시산책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인천문화현장 주유기(周遊記) 본문
한 도시산책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문화현장 판-돌아보기(記)
1. 산책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에 대하여
인천의 문화예술현장을 나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며 자신들의 작업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분들을 보며 크나큰 존경심을 느끼기도 했고, 더불어 도시의 품위란 그들의 땀방울과 헌신 속에서 비로소 확보될 수 있는 거라는 믿음 또한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행사나 공연을 만든 주체들 모두가 자신의 작업에 많은 것을 걸었을 거라는 걸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러한 공력에 비해 기획의도와 그 결과물이 실망스러웠던 적도 솔직히 많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현장에서는 진부함과 매너리즘을 느끼기도 했고 심하게는 도대체 이런 문화행사를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지 그 정체성이 모호한 현장을 만나기도 했다는 거지요. 이제 그러한 주유의 경험들을 풀어놓아볼까 합니다.
아참, 저는 전문적인 문화비평가도 아니고 행사기획자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글에서 소개되고 언급되는 모든 내용은 평범한, 그러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은 결코 적지 않다고 자부하는 한 감상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뿐임을 밝혀둡니다. 따라서 뭔가 대단한 정보나 앎의 즐거움을 느끼고자 이 글을 읽는다면 상당 부분 배신감을 느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 역시 시를 쓰는 문학예술가로서 장르와 형식은 다르지만 문화현장에서 작업하는 문화일꾼들이나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정서적 연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애초부터 비평(나쁘게 말하면 지적질)을 염두에 두고 인천문화예술 판의 이곳저곳을 저인망식으로 돌아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몸이 하나인지라 모든 공연이나 전시, 축제의 현장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나에게도 몸에 밴 취향이나 머리에 박힌 기호(嗜好)가 있기 때문에 앞서 밝혔던 것처럼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이고 제한적인’ 산책 후일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그래요. 이 글은 문화를 애호하는 다양한 산책자들의 산책 후일담 중 함량이 한참 모자라는 하나일 겁니다. 따라서 읽는 분들이 공감할 부분도 있을 것이고 ‘어, 이건 아닌데’ 하는, 이견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자, 그럼 제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판-돌아보기 앞부분에서는 지역에서 쟁점이 되었거나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는 몇몇 사안에 대한 제 나름의 견해를 피력할 것이고 뒷부분에서는 제가 돌아봤던 구체적인 공연이나 전시 등을 장르별로 일별하게 될 것입니다.
2. 문화재단 혁신위원회의 성과와 한계 : 출범 배경과 결과를 중심으로
혹시 2019년 벽두부터 신포동 발(發) 재단소식 때문에 삶은 고구마를 김칫국 없이 통째로 먹은 것 같은 답답함과 우려를 느끼시진 않았나요? 하긴 재단이 바람 잘 날 없이 시끄러웠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요. 대표이사 선출문제부터 시작해서 내부의 운영문제, 인사문제, 지역과의 소통문제, 구성원 사이의 갈등문제 등등 논란거리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잖아요. 제 생각에는 다소 침소봉대된 측면도 있고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각각의 주체들이 소통과 협업보다는 승자독식에 대한 미망을 버리지 못한 채 치킨게임을 벌인 결과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다들 아시잖아요. 상충하는 이견 그룹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대승적인 관점에서 연대를 제안하는 아름다운 그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왜냐하면 각각의 이견그룹 모두가 솔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래, 이것은 분명 문화권력 쟁투다. 하여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인데 어찌 질 수가 있겠는가.”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그나마 욕망의 정직한 표백(表白)이라 할 것입니다. 이론(異論)으로 윤색된 진영논리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며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는 지점이지요.
각설하고, 아무튼 그 동안 내연하고 있던 재단과 관련된 제(諸) 문제들이 2019년 벽두에 다시금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표출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재단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시 정부의 성급한(아니 어쩌면 의도된) 판단과 개입, 그 약한 고리를 놓치지 않고 타격해 들어온 재단 비토세력들의 발 빠른 대응, 올곧게 자기의 현재적 위상을 감당하지 못한 대표이사의 우유부단한 행보, 그것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 선명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지 못한 채 사태의 흐름을 추수(追隨)한 재단 내부(아마 현실적 한계는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의 미적지근한 행보 등 문제를 악화시킨 요인은 무척 복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머리 아픈 난맥의 해결을 위해 시 정부가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며 재단과 시민사회에 내민 카드가 재단혁신위원회 구성안이었지요. 혁신, 참 좋은 말이긴 합니다만 누가, 어떻게, 무엇을 혁신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위원 선정 단계부터 말들이 많았던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시가 직접 인선, 임명한 지역 문화계 4명, 재단 대표 및 이사 4명, 노조 2명, 인천시와 시의회 2명 등 12명의 혁신위원들은 2월부터 본격적인 모임을 갖고 낙하산 인사 차단, 대표 선출 절차 개선, 공정한 인사시스템 구축, 창의성과 다양성 보장 등 재단의 독립성과 조직 및 인사 효율성을 높이는 혁신안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언론이나 현장을 참관했던 이들을 통해 전해들은 회의 내용이나 분위기는 다시 한 번 시민사회와 문화예술인들의 답답함을 증폭시키기도 했지요. 재단을 혁신하기에는 전문성이 태부족한 위원들의 자질 문제가 다시 불거진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구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혁신위원회의 시간은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의 반달처럼 꿋꿋하게 흘러갔고, 드디어 지난 8월, 최종안을 제출하며 활동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제출된 혁신안은 같은 달 14일, 인천 미추홀구 문화창작지대 ‘틈’ 1층 다목적실에서 열린 ‘인천문화재단 혁신안 토론회’를 통해 시민사회와 문화예술인들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날 혁신안에 대한 전문가 토론에 이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기도 했는데, 물론, 당연히, 예상했던 것처럼 우려의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었지요. 우려의 요지는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대안이나 실행 계획은 제시하지 못한 채 인천문화재단의 고질적인 문제를 원론적인 차원에서 나열해놓기만 했다는 것이었지요.
그 ‘뜨거운 감자’를 전해 받은 문화재단 이사회는 서너 차례의 간담회와 정례이사회를 통해 혁신안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봤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했지만 결국 그것을 수정하지 못한 채 지난 12월 27일 재단혁신안을 최종 승인, 의결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 과정은 개운한 것이 아니었지요.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혁신위로부터 올라온 조직체계는 그 효율성이나 업무분장 측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었거든요. 그래서 이사들은 집요하게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좀 더 심도 있는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끝내 관철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승인의 시급함을 강조하며 대표이사 및 노조가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재단 업무 일정의 빠듯함이었지만 사실 속내는 꼭 그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올 마지막 이사회였던 27일 회의에서는 전차 이사회의 결정사항(조직체계와 관련해서는 전문적인 컨설팅을 받아서 최종 결정한다)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폐기(대표이사는 폐기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된 것에 대해 몇몇 이사들의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지요. 하지만 해당 사안을 다시 처리하기에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는 대표이사의 읍소에 결국 대표이사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던 겁니다. 전형적인 미봉(彌縫)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회는 재단의 최고 의사결정 단위인데, 대표이사가 그 의결단위의 권위와 정체성을 훼손한 꼴이 돼버린 셈이지요. 이사들 스스로도 회의의 권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고요. 물론 임명 초기부터 여러 구설에 시달린 대표이사로서는 하루빨리 혁신안을 통과시켜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구설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겁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는 행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회 최종안을 인천시에서 승인을 하면 2020년부터는 혁신안대로 재단운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재단혁신안은 그렇게 마무리가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재단의 혁신이 완성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시도한 많은 변화 중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변화도 있을 것이고 다소 뜨악한 변화도 존재하겠지요. 그 변화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하나하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3. 도시재생 담론 및 건축물 철거에 대한 개인적 생각
이번에는 요즘 인천에서도 자주 화두가 되곤 하는 도시재생 담론 및 (역사문화유산으로 추정되는) 건축물 철거와 관련해서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사실 도시재생 문제는 최근에 도출된 이슈가 아닌, 구도심을 품고 있는 많은 도시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고민을 경주해 온 제법 연조가 있는 이슈입니다. 하지만 인천민예총 역시 2019년 하반기에 문화적 도시재생을 주제로 이슈포럼을 진행했잖아요? 그것은 그만큼 이 이슈가 여전히 현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인천 도시재생 담론이나 건축물 철거와 관련한 활동가들의 실천 양상을 접하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도시생태주의자들의 주장(과거 공간이나 건축물의 보존 및 복원)에 담긴 합리적 핵심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요. 그럴 리가요. 다만, 현재적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거의 것이라면 무조건 보존하고 보자는 극단적 보존주의자들의 견해에는 쉽사리 수긍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도시는 물론 그 도시의 거리와 건물도 나이를 먹습니다. 곱상하게 나이 먹어 온 경우도 있고 온갖 풍상을 겪으며 늙어왔고 늙어가는 경우도 있겠지요. 또한 사랑받아 마땅하나 당대의 조건과 상황 때문에 혹은 사람들의 무지 때문에 외면당해 온 것들도 있고 버림받아 마땅하나 이해관계 때문에 근거 없는 사랑을 받아 온 것들도 있습니다. 인간의 다양한 삶처럼 그것들의 삶과 운명 또한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이 보여주는 외관과 그 외관에 스며있고 내면이 품고 있는 역사의 환기를 통해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발전적으로 조형(造形)할 수 있는 경우라면 모를까, 스스로 쇠멸의 의지를 보이고 있는, 혹은 없애는 것이 오히려 주변 풍광과 또 다른 가치 생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 것들은 없애주거나 스스로의 의지에 맡겨 두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들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어가듯 거리와 건물도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주장은 정작 극단적 보존주의자들이 평소에 자주 하는 주장이긴 하지만……) 모든 주검은 반드시 미라를 만들어서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을뿐더러 자신들만이 해당 공간을 사랑하고 그 공간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있다는 왜곡된 선민의식에 다름 아닙니다. 극단주의자들이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도 과거의 조형물이자 아픈 역사를 환기시켜주는 것이니 반드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게 이상합니다. 이 얼마나 희한한 자가당착인가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현재 그곳에서 발 딛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입장이 항상 배제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활동가 자신의 명함을 위한 재생사업이 아니라 도시와 인간을 총체적으로 겨냥하고 고민하는 입장에서 도시재생과 건축물 철거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4. 몸피를 줄여 재구성된 인천문화포럼
2019년도 인천문화포럼은 많은 변화를 보였습니다. 포럼위원들도 검증된 전문가들로 다시 꾸려졌고 분과의 명칭도 바뀌었습니다. 애초 포럼이 만들어질 때는 선거를 염두에 둔 ‘관제포럼’ 아니냐는 힐난을 받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전임 시장이 문화영역으로의 광폭 행보를 시작할 때 급조된 조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포럼의 발생 배경과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몇몇 건강한 위원들의 선진적인 활동은 포럼의 성격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포럼 구성에 내포된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게 기왕에 ‘열린 판’을 알찬 내용과 건강한 비판으로 채움으로써 (일종의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는) 의견그룹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나는 몸이 가벼워진 변화된 포럼에 대해 좋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논의의 효율성 제고(提高)는 물론이고 실현가능한 의제(agenda) 또한 많이 제출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속된 분과는 예술창작분과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창작’이란 단어에 맘이 가서 두 말 않고 합류했던 것인데, 막상 합류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창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종일관 지원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더군요. 아마도 제대로 된 창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재정적, 공간적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또 그만큼 예술가들의 실재 창작 현실이 팍팍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여담이지만 요즘 기획자들이나 단체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예술가들은 조만간 모두 고사할 운명에 처해진 듯합니다. 하지만 국가와 지자체 등 공공(公共)이 전혀 예술가를 보호해 주지 않던 시절, 오직 예술가로서의 자존 하나로 힘겨운 시간을 통과해 온 허다한 예술가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요즘은 오히려 많이 좋아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말하는 나에 대해 젊은 기획자 출신 위원들은 ‘꼰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주고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은 물론 삶까지도 일단은 스스로 챙기고 가꾸고 선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공으로부터의 지원이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지원은 시민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고 하더라도, 지원이 아니면 허다한 예술가가 다 고사하고 예술창작은 지지부진해질 거라는, 하여 지원만이 예술과 예술가를 살릴 수 있다는 주장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터무니없는 이상주의자이거나 대책 없는 ‘꼰대’인 게 분명합니다.
5. 해프닝으로 끝난 시민문화헌장 제작
나는 2017년 시민문화헌장 TFT에 합류해 만 2년 간 활동을 해왔습니다. TFT는 그 동안 여러 차례의 회의를 통해 쉽고 명료하며 진부하지 않은 헌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년 늦가을(2018년), 노력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고 공청회를 열어 시민들의 의견도 청취했습니다. 물론 의견은 다양했지요. 고민해 봐야 할 의미 있는 의견들도 있었고 이해 부족에서 오는 문제제기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제기된 의견들을 반영하여 다시 문구를 수정했고, 최종안을 만들어 시에 제출했습니다.
헌장 제작은 시의 조례에 의거한 공식적인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헌장 제작이 완료되면 공식적인 행사자리를 만들어 시장이나 시 관계자가 인천시민문화헌장을 시민들에게 선포하기로 로드맵이 작성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제출 이후 한참 동안 시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고 그 사이 문화재단 대표이사와 시 담당 공무원은 물론 재단에서 그 일을 담당하던 실무책임자까지 모두가 바뀌었습니다. 결국 사업의 연속성이 끊어져 버린 것이지요. 그러고도 한 동안 별다른 소식 없이 다시 또 1년이 지나간 후, 2019년 가을에야 비로소 시로부터 연락이 왔고 일부 위원들이 다시 모여 헌장의 처리와 활용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제작 초기에는 일정이 빠듯하다며 계속 닦달을 해대던 인천시가 막상 완성된 헌장의 활용에 대해서는 “발표시점을 조율 중이다”라는 말만 던져놓고 종무소식의 태도를 보였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시에서도 인사이동이 있어 제작 당시 함께 했던 팀장과 담당자가 모두 다른 부서로 가버렸기 때문에 업무 이관과 파악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TFT에서 활동했던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겠지만, 완성된 헌장이 내 맘에 쏙 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작성한 초안이 많은 손질을 당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단어와 표현들은 이해집단들로부터 문제제기가 들어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시 정부로서는 무척 불편할 수 있다며 ‘노동, 인권, 환경’과 관련된 단어들을 수정, 완화해 달라는 요구를 시로부터 전달받았는데, 그 점이 나로서는 상당히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또한 짧게 작성하라는 요구 때문에 전문의 양을 줄이다 보니 강조해야 할 내용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점 또한 아쉬움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마지막 회의를 통해 다시금 몇몇 문구를 수정한 최종안을 시에 건넸으니 이제 활용하든 폐기하든 그것은 시 정부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다만 앞으로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만 아마도 2019년 버전의 인천시민문화헌장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을…….
6. 2019년 행사 유감(有感) : 인상적인 혹은 인상을 쓰게 하는……
가을이 되면 다양한 전시와 축제(행사)들이 열리곤 하지요. 더구나 기왕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아프리카돼지열병 때문에 취소됐던 축제나 유예됐던 행사들까지 뒤늦게 다시 열리다보니 10월부터는 그야말로 축제와 행사에 치여 죽을 지경입니다. 물론 그 행사들 중에는 역사나 의미를 생각할 때 반드시 열려야 하는 것도 있고, 그 밥에 그 나물처럼 한 해 거른다 해도 딱히 아쉬울 게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행사들이 ‘귀중한 나의 시간’을 너무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만든(기획한) 이들과의 정리(情理)나 부채감이 참석 요구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주최 측과 딱히 관계는 없지만 봐야할 필요성이 있는 행사란 판단에서 일부러 시간을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든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2019년에는 솔직히 실망감을 안고 돌아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건(실망은) 내가 소속되어 있는 단위나 나와 친한 사람들이 만든 행사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뭐랄까,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참가자들의 면면을 보면 요 몇 년 사이에 늘 봐왔던 포맷, 봐왔던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건 행사의 준비 주체들이 신명이 나서 준비한 게 아니라 뭔가 의무방어전을 치르듯 형식적으로(심한 말로는 보조금을 땄으니 일단 치르고 보자라는 생각으로) 만들어낸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매번 보는 사진들, 매번 보는 넋풀이 춤, 매번 보는 풍물패에 매번 만나는 가수와 퓨전음악그룹…… 열악한 지원금으로 그만한 행사라도 만들어낸 것을 위로해야 하는 것일까요? 세금으로 하는 사업이라면, 자신 없거나 콘텐츠가 형편없으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다른 사업을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문화예술을 통해 도시의 품격을 높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지요. 시민의 수준과 문화향유 욕망을 전혀 가늠하지도, 맞추지도 못하는, 아니 가늠하거나 맞출 생각도 없는 기획자 및 활동가들이 횡행하는 현실은 관에서 풀어놓은 돈 중에는 ‘눈먼 돈’이 많기 때문일까요? 창의력을 발휘하기보다는 관의 요구와 눈높이에 맞춰서 기획서를 써내는 활동가들도 문제고,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전시적 효과만 만족시킨다면 혈세를 펑펑 퍼주는 관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전문 기획비 사냥꾼이 활보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명감 있고 똘똘한 공무원이 그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현장 실사를 나오고 페널티를 줄 경우, 게으른 기획자들과 소위 명망 있다는 활동가들은 팔걸이원칙 운운하며 피해자 코스플레를 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그 명망성이란 것도 공무원들이 원하는 기획서를 잘 써서 많은 지원금을 타낸 후, 그것을 가지고 백화점식으로 사업을 펼쳐낸, 조악한 이력을 부풀린 명망성일 테지만……
아무튼 행사나 전시장 가기가 귀찮다가, 짜증 단계를 넘어서 화가 났다가 최종적으로 무서워졌던 시간이 많았습니다. 특히 예술가들이 대거 결합한 축제나 행사의 경우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 시민의 세금으로 그런 성의 없는 전시나 행사(축제)들을 만들어 낼 생각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할수록 안타깝습니다. 예술가들의 안이함(가끔은 교활함)과 자본의 침투력이 만들어 내는 문화예술의 하향평준화라니…….
7. 산책의 이력(履歷)들
1)풍물패 ‘더늠’의 <2019 단오맞이 인천풍물대동놀이 한마당>
행사와 축제가 많은 6월이군. 뭔가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 뭔가를 기원하고 싶은 사람들, 뭔가를 고발하고 싶은 사람들이 광장이나 강당, 거리에 모여 행사를 만드는 거겠지. 어제는 공통의 경험을 추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강당에서 만났고, 오늘은 모종의 흥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광장과 거리에서 만났지. 사실 나는 두 경우 모두 약간의 의무감과 궁금함이 혼재된 마음의 상태가 되어 참석했던 거야. 가끔 빗방울이 떨어져 행사를 만든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다행히 큰 비가 되지 않아서 행사를 무사히 끝낼 수는 있었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는 않았더라고. 늘 생각하는 건데 문화예술회관 앞 광장이나 야외무대는 생각보다 유동인구가 많질 않은 게 사실이야. 젊은이들은 대부분 건너편 먹자골목이나 로데오거리 일대에서만 노는 것 같더군.
그래도 풍물패 더늠은 수고가 많았어. 창단 20년이 훌쩍 지났으니 인천에서는 만만찮은 이력을 지닌 풍물패라고 할 수 있지. 최근 들어 더늠은 인천의 다양한 문화예술 기획 사업과 결합하고 있는데, 부디 성과에 대한 조급함 때문에 풍물패 본연의 임무와 역할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재정 확보 차원에서 사업에 접근할 경우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예인으로서의 자존을 잃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안정적인 재생산구조가 마련되지 않은 예술단체나 조직의 경우 예인의 자존보다는 전문행사장이로 전락할 위험과 유혹이 많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후배들의 고집과 예술에 대한 순정함을 믿고 있(싶)어. 아무튼 오늘 행사에 참가한 모든 풍물 팀들, 수고 많았어요. 아, 그리고…… 공연 그 자체야 뭐 늘 봐왔던 거니 새로운 감동을 크게 받은 건 아니지만, 공연장에서 먹은 주먹밥과 지평막걸리는 정말 맛있었어. 고추장아치와 물김치도 예술이었지.
2) 낭독극 ‘우연한 빵집’
―2019년 6워 27일 오후7시, 복합문화공간 ‘지금’
후배 이은선(배우, 연출가)이 연출한 낭독 극을 관람했지요. 본래 가지고 있던 연습공간을 낭독전용극장으로 리모델링한 후 처음으로 진행하는 공연이었습니다. 텍스트는 지난 해 발간된 청소년 소설 『우연한 빵집』. 세월 호로 희생된 여고생과 그녀를 기억하는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슬픔을 어떻게 극복해 내고 있는가를 이야기한 작품이었어요. 수년 전에 일어난 비극이지만 ‘세월 호’의 슬픔은 극복되지 않은 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이 작품은 출발합니다. 다시 말해서, 극복이 요원해 보이는 이 국민적 트라우마가 어떤 방식으로 남은 이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그들의 일상을 흐트러뜨리고 있는가를 섬세한 감성으로 천착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이 그 슬픔을 극복하고 건강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확보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은선이 전용극장 개관 후 첫 작품으로 이 소설을 선택한 것이 나는 고맙습니다. 기억을 위한 레퀴엠이라고나 할까. 기억함으로써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을 신원(伸冤)해 주고 비로소 그들을 하늘에 들게 하는 레퀴엠……. 낭독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예술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연수국제무용제+프로젝트 ‘사계(四季)’
무용가 박혜경(연수무용협회 회장)이 기획하고 연출한 두 개의 공연 및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두 개의 공연(전시 포함)이라고는 했지만 같은 공간(송도트라이보울)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 같은 ‘품앗이 행사 참석er’에게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발품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적기 때문입니다.
일단 유네스코 인천협회에서 주최한 ‘四季’는 그림과 사진,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협업(콜라보) 공연이었어요. 이를테면 봄여름가을겨울, 각 계절 섹션별로 그림이나 사진을 하나 걸어놓고 그 앞에서 춤을 추거나 연주를 하는 형식이었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나에게는 그러한 협업이 무척이나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웠습니다. 인위적으로 멋을 내기 위해 다양한 액세서리를 걸친 성장(盛裝) 미녀 같았다고나 할까요. 전시는 전시대로 공연은 공연대로 진행했으면 오히려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아마도 턱없이 부족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공연의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과정에서 비롯된 부자연스러운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연수구예술인협회에서 주최하고 연수구무용협회가 주관한 국제댄스페스티벌, ‘Emotion Project1’은 그런대로 볼거리가 있었습니다. ‘국제(international)’라는 단어가 다소 민망할 정도의 옹색한 라인업이었지만 출현한 이탈리아와 말레이시아 무용수들의 공연은 ‘국제적’이라 말해도 될 만큼 수준급이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무용가들의 공연을 볼 때는 너무 우아하고 너무 절실하고 너무 감동적이어서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내가 발레나 무용 예술의 동작 언어를 독해하는 데에는 과문한 탓에 공연의 의도를 백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했겠지만, 나 같은 문외한이 감동했다면 그 공연은 좋은 공연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5) 2019 인천 풍물명인전(송도 트라이보울)
―8월 23일(금), 7시30분, 인천민예총 전통예술위원회
명인의 탁발한 기예에 기댄, 다소 느슨한 기획과 안이한 구성. 풍물은 그 자체로 신명나는 공연이었지만, 준비한 후배들의 노고로 공연의 품격을 인정하기엔 솔직히 그 맛이 매우 서운했습니다. 공연장(트라이보울) 주변에 불던 가을바람이 오히려 상쾌했지요.
6) 제5회 작가와의 대화
―2019년 9월 21일(토), 소금꽃어린이도서관
인천작가회의에서 소속 50대 소설가 세 명이 최근 작품집을 동시에 발간했습니다. 두 명(이상실, 최경주)은 소설집, 한 명(조혁신)은 산문집. 책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면서도 힘든 일인가를 알기 때문에 해당 저서들의 문학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뜨겁게 응원해주고 싶었습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노동’이라는 문제를 일관되게 다뤘다는 것인데, 최경주 작가의 경우는 80~90년대의 정통 리얼리즘 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좀 다른 각도로 노동 문제에 대한 변주를 시도해 왔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각각이 처한 존재조건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요.
특히 최경주 작가의 경우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왔고 현재도 닥트노동자로서 쟁의 현장에서 투쟁 중에 있습니다. 또한 등단도 ‘전태일 문학상’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작가의 이러한 태생적 정체성이 현재까지 그의 작품을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독자들에게 좀처럼 읽히지 않는 노동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버릴 용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한 상황에 대한 응전에 게으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전자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현장 노동자가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야만 가능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 조건을 가진 그에게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소설 쓰기와 상상력을 요구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나는 그의 소설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리얼리즘 소설의 날 것 그대로의 문장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문장들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지요. 낯익음은 일단 진부함으로 느껴질 소지가 큰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진부함보다는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사한 문장의 힘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먼저 그 힘들고 모진 상황을 벗어난 사람의 부채감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 후기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교묘한 공격에 무장해제 당한 셈이니까요. 물론 자발적으로 투항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내가 지녀왔던 신념의 시대적 정합성을 의심하는 행위가 깊은 철학적 사색이나 구체적 실천을 통해 검증된 것이라기보다는 당면한 현실의 곤혹스러움 때문이었다는 건 분명하니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소설은 평자들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게 뻔하고, 평자들의 평가에 자신의 독서 취향을 많이 빚지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그리 많이 읽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그의 소설이 너무 아프고 ‘낡은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낡은 감수성’에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그들, 혹은 그것들로부터 너무 멀리 도망쳐왔다는 자괴와 미안함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여전히 노동과 신념으로, 그 노동과 신념이 버무려진 소설을 무기로 그곳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올곧음이 안쓰럽고 그의 한결같음이 안타까우며 그의 무모함이 부럽기 때문에 미쁘면서 슬픈 것입니다.
8) 연극 '사과는 잘해요'(김병균 각색/연출)
―2019년 10월 18일~19일 7시, 스페이스빔
까칠하고 뒤끝 있는 연출가 후배로부터 공연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작품은 이기호 작가의 소설 <사과는 잘해요>를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 이기호 작가는 위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여기저기 초청되어 강연회도 허다하게 진행했기 때문에 그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후배가 어떻게 각색했을까 궁금했는데, 비교적 무난하게 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뒷부분, 특히 결말의 임팩트가 다소 약해서 앞에서부터 끌어온 긴장이 맥없이 풀리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건 원작인 소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후배만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최근 인천 연극의 흐름 속에서는 쉽게 만나 보기 어려웠던 사실주의 연극을 만나게 된 것이 (관극 과정은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인권이 땅에 뱉은 껌처럼 취급되던 80년대의 그악스런 상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삼청교육대일 것이라 추정되는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것 자체가, 아니 이기호 작가의 소설을 텍스트로 선택한 것 자체가 후배의 지향과 고집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특히 연극공연에 특화된 전용극장이 아니라 ‘스페이스 빔’이라는, 버려진 공간을 재생하여 사용하는, 다소 을씨년스러운 공간을 무대로 사용함으로써 극적인 처연함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극장을 빌릴 여유가 없어서 선택한) 고육지책의 결과인지 알 수 없지만, 감독과 배우들 입장에서는 무척 손이 많이 가는 공연을 ‘사서 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감독은 조명, 음향까지 손수 담당해야 했고, 배우들은 1층에서 2층으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1인 다역을 하며 어둠 속을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했으며 마루가 아닌 시멘트바닥에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물레방아’ 등 고문당하는 장면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으니, 관객 입장에서는 (극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 애잔함 때문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앞으로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작품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라며 안경을 고쳐 쓰는 후배의 얼굴에서 무모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믿음직스러운 작가적 고집을 보았습니다. 그나저나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이라서 그런가. 공연장엔 왜 그리 벌레들이 많았던 것인지…….
9) 2019황해미술제 : 평화로 날다
―2019년 10월 25일~27일, 부평공원 소나무광장
평화를 주제로 내건 미술제였기 때문일까 전시된 그림들은 대개가 낯이 익었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작가들의 ‘늘 봐왔던 작품’들이 아니라 학생들이 그린 재기발랄하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들이었습니다. 어린학생들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고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만도 미쁜 일인데, 이렇듯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감수성을 작품으로 형상화해 내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견한 일인지요. 학생들의 작품이 없었다면 2019평화미술제는 늘 치러왔던 그렇고 그런 행사의 반복에 그치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번 행사의 일등 공신은 단연코 참여한 학생들과 그들의 작품입니다.
10) 제30회 인천노동문화제
―2019년 10월 27일, 부평역 쉼터 공원
초기 노동문화제는 단순한 축제 그 이상의 의미였지요. 시절이 엄혹했고 노동자들이 집회 현장이 아닌 광장에서 하나가 되어 소통하고 위로하고 새롭게 결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지역의 선후배들이 의지를 가지고 조직하고 실행하고 꾸려온 것입니다. 물론 그간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정세가 가팔랐을 때는 오히려 형형한 눈빛으로 연대하던 노동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우경화되거나 형식적 민주주의의 당의정에 취해 연대의 끈을 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문화제 조직을 책임지는 핵심 주체들의 사분오열도 원인의 하나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삐걱거리면서도 오랜 세월 이 문화제를 새삼 추스르고 힘겹게 인내하며 오늘까지 끌고 온 것은 몇몇 탁월한 후배들의 희생과 헌신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11) 김건환 사진전 ‘결’
―2019년 11월 3일, 화교역사관
건환 형은 참 고집스럽습니다. 요즘 인천의 사진작가들 상당수가 재단이나 시의 지원 사업에 집중하며 작품 사진보다는 사업 관련 사진만 찍고 있는데 이 형은 돈도 안 되는 ‘자신만의 사진’만 찍고 있으니…… 그것도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옛날 사진관에서나 볼 수 있는 차광막(遮光幕)이 있는 커다란 아날로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전국을 누비고 있다니까요. 포구나 소금창고나 숲속에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가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 몇 분간의 시간 동안 게릴라처럼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의 사진은 시간의 예술이고 빛의 예술입니다. 그 사진은 어둠을 묵묵히 견딘 사람만이 찍을 수 있는 사진입니다. 대지의 사물들도 건환 형의 그러한 노력에 답을 해주듯 범인(凡人)의 눈으로는 좀처럼 포착하기 힘든 미세한 몸짓들을 기꺼이 보여줍니다. 나는 사진 미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그의 사진에서 항상 사물을 대하는 그의 겸손한 자세와 예술을 향한 열정을 느끼곤 합니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 역시 건환 형의 고집스러운 작업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마룻바닥이나 낡은 벽, 버려진 갱목이나 침목들이 간직한 다양한 결들을 집요하게 탐색한 것이지요. 그것은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저마다의 삶의 역사를 천착하는 작업이자 건환 형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작업에 다름 아니었을 겁니다. 사진들은 흡사 그림과 같았습니다. 수천, 수만 배로 결을 확대하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나무 고유의 삶의 흔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환상적인 세계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면서 형은 분명 소멸하는 것들이 발산하는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지막 숨결을 느꼈을 게 분명합니다. 그것은 또한 삶에 대한 경외를 느끼는 시간이자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는 부박한 인간의 삶을 반성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뚝심 있는 건환 형의 작업을 앞으로도 응원할 것입니다. 그는 현재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예술을 올곧게 진행 중인 보기 드문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12) 뮤지컬 언노운
―2019년 11월7~9일,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
인천에서 단일 사업으로는 만만찮은 지원(금)을 받아 창작, 공연된 후배의 작품을 관람했어요. 어울리지 않게 R석을 예매했지요. 예술인 할인 50%를 받았지만 인천에서 공연된 작품 관람비로는 가장 많은 금액(35.000원)을 지불한 셈입니다. 그것이 후배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소박한 믿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공연은 공을 많이 들인 느낌이 들더군요. 배우들의 노래 실력과 연기도 안정된 수준이었고 단출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를 충분히 조성해 낸 무대 장치도 무난했습니다. 삽입된 노래들도 듣기 편하고 흡입력이 있더군요. 문득 작곡가의 프로필이 궁금해졌습니다. 경력이 있는 작곡가가 아닐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줄거리 상의 빈 지점이 자꾸만 맘에 걸려 불편했습니다. 예를 들어 남녀 주인공 사이에 러브라인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다소 작위적이었고, 그러다보니 일본총독부 간부 아들인 남자주인공이 목숨을 잃어가며 독립운동조직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도 설득력이 약했습니다. 물론 인천 조병창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민족감정을 조금만 건드려도 관객들은 일단 호응하고 일부 감동할 것이 분명하지만 현장 관객의 즉자적인 반응이 작품의 완성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또한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의 음향시설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특히 합창을 하거나 고음으로 배우들이 열창을 할 때 스피커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음향시절 자체의 문제인지 음향감독의 기계 작동상의 스킬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개운하지 않더군요. 어쩌면 내가 오른쪽 스피커 앞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었겠지요.
관객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소재를 작품화 할 경우 한편으로는 공감의 폭을 넓혀줄 수 있어 장점일 수 있지만 다양한 극적 장치와 개연성 있는 스토리가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오히려 감동을 약화시킬 수도 있는 위험성 또한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그 장점과 위험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후배(연출자)에게는 오늘처럼 규모 있는 작품의 대본을 쓰거나 대극장 공연을 연출한 것이 처음일 것입니다. 그 성긴 경험에도 불구하고 석 달 만에 이렇듯 완결된 작품을 무대에 올려준 것이 얼마나 고맙고 대견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이번 공연(경험)에 대한 정확하고도 냉정한 평가를 통해 향후에는 더욱 업그레이드 된 양질의 작품을 우리 앞에 보여주길 기대해 봅니다. 인천시민으로서, 관객으로서, 좀 더 사적으로는 후배를 아끼는 선배로서 끝까지 마음으로 응원할 것을 약속합니다.
8. 사족 혹은 아쉬움
지난 일 년 동안 문화예술 현장 속을 느슨하게 주유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돌아올 때면 늘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잡음과 이해(利害)의 상충(相衝)이야 항용 있는 일이겠지만 작금의 그곳에는 ‘론(論)’은 없고 ‘썰(說 혹은 舌)’만 무성합니다. 이해(理解)와 포용은 없고 반목과 배타만 음산하게 흐릅니다. 확인되지 않은 썰(說)들은 하나 같이 칼을 품고 있습니다. 도무지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질 않습니다. 물론 문제의식의 표백(表白)이나 비판적 포즈의 선점이 난맥과 질곡의 책임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거나 면피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여 나 역시 허다한 잡설(雜說)의 양산에 알게 모르게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운 게 사실입니다. 다만, 원하건대, 논(論)을 전제로 쟁(爭)을 하든, 설(說)을 무기로 투(鬪)를 하든, 문화와 예술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제발 품격을 갖췄으면 좋겠습니다. 우아해질 수 없다면 (쓰임의 상황과 맥락은 다르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쫀쫀하게 문화예술 현장을 돌아볼 생각입니다. 판을 돌다 보면, 판도라의 상자를 개봉한 것처럼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만나게 되겠지요. 황홀하고 벅찬 순간도 있을 것이고 돌아보기 민망한 상황도 연출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여전히 희망의 가능태이고 삶의 다채로운 활력소가 될 수도 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합리적 낙관으로 절망조차 희망으로 전화(轉化)시킬 수 있는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고단한 행복은 계속될 것입니다.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오늘도 자신의 많은 것을 막연한 미래를 향해 기꺼이 기투하고 있는 모든 예술가와 문화활동가들에게 경의와 더불어 연대의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쟁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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