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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분주한 하루였다. 출근해서 일하다가 오후에는 CDP 고치러 송도까지 다녀왔다. 솜씨가 신급(神及)이라고 소문난 사장은 CDP를 뜯어서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퓨즈를 바꿔 끼우기만 하면 터져버린다며, 정밀한 검사를 해봐야 한다며, 당일 수리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게다가 부품이 없을 경우 외국에 부품을 주문해야 하기 때문에 수일에서 수주가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사람이 참 선하게 생겨서 일단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지만, 솔직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망스러웠다. 이 무더운 날씨에 송도까지 무거운 CDP를 들고 갔다가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오는 일은 무척 짜증 나는 일이다. 일단 맡기고 돌아오긴 했는데, 결과(견적을 포함해서 수리 가능 여..

장마가 물러가자 (물러간 건 맞나?) 가마솥 찜통더위가 찾아왔다. 점심때 이발하러 미용실에 들를 때만 해도 구름이 많고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오후가 되면서 구름이 걷히고 우기(雨期) 동안 얼굴을 감췄던 7월의 태양이 작열했다. 이발하고 미용실을 나오기까지 30여 분 사이, 길 위에서 만난 햇볕은 많이 사나워져 있었다. 어언 일주일 동안 발산하지 못한 볕을 한꺼번에 뿜어내는 것 같았다. 사람의 변덕이란 얼마나 죽 끓듯 하는지,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축축하고 눅눅해 못 살겠으니, 이제는 볕을 보고 싶다고 성화였는데,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불볕을 쏟아내는 7월의 태양을 향해 온갖 욕설을 늘어놓고 싶어졌다. 이러니 여름과 나는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휴가철이라서 청사도 조금 한산..

에어컨 때문일까,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질 않다. 늘 눈꺼풀이 무겁고 어깨는 결리고 아프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몸의 곳곳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통증과 더불어 사는 일이다. 그래서 힘들긴 하지만 짜증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틈틈이 스트레칭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도 비는 종일 내렸다. 점심때 잠깐 비가 그쳐 서둘러 채소 가게에 다녀왔다.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떨이로 파는 채소들이 많았으나 필요한 양만큼만 샀다. 싼 맛에 사들이면 분명 다 먹기도 전에 썩거나 시들어 결국 버리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오늘은 초복이라는데, 누나에게서도 별말이 없다. 매번 복날이면 삼계탕을 끓여주거나 닭을 사다 주곤 했는데, 올 초복에는 소식이 없다. 바쁜 ..

종일 뭔가에 쫓기듯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확하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 나를 지배하는 전반적 정서가 그렇다. 불안하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모멸스러운……. 불안의 원인은 다양하고, 그래서 하루아침에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겠지만, 미안하고 죄스러운 건 맘만 먹으면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래서 모멸스러움이 더한 건지도 몰라. 확실히 뭔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있는 거지. 일단 주식이 그렇고, 인간관계가 그렇다.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는다. 그래서 잠깐 주식에서 고전 중이다 보니 모든 면에서 의욕이 꺾인 건 아닐까 하고, 아주, 매우, 퍽, 상당히, 노골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좀 그렇다. 맞..

일주일째 계속되는 우기, 몸도 맘도 눅눅하고, 습기를 먹은 이부자리도 눅눅하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덥진 않았지만, 제습을 위해 때때로 에어컨을 틀었다. 어제 술 마셔서 오늘 아침 해장하려고 싱크대 수납장을 열어 보니 라면이 없었다. 대신 냉면을 끓일까 했는데 육수도 떨어졌다. 가게에 가서 안성탕면과 우유,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그리고 쿠팡에 라면과 육수, 라면 사리 등을 주문했다. 비가 그치면 채소 가게에도 가야 하는데,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다. 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나쁘지 않지만, 몸과 마음에 곰팡이가 필까 봐 그게 걱정이다. 최종천 시인의 부고를 받았다. 열흘 전쯤 뇌경색으로 쓰러진 채 방치되었다가 사나흘 만에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최 시인의 사망 소식이었다. 사실 발견되었을 ..

수홍 형이 우리 동네를 방문했다. 만수동까지 오기 귀찮다며 구월동이나 부평에서 만나자고 했던 그간의 태도와 달리 오늘은 “어디서 봐? 오늘은 문 시인 동네로 갈까? 맛있는 데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웬일이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반가워서 “음, 장수족발도 있고 충청도집 주꾸미 철판구이도 있고……” 했더니, 형은 “아, 충청도집, 나 옛날에 거기 자주 갔지. 거기 좋다. 거기서 만나”라며 반가워했다. 그래서 5시에 충청도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4시 50분쯤 집을 나와 형이 타고 올 30번 버스 정거장인 현광아파트 쪽으로 슬슬 걸어갔다. 비는 잠시 멎었지만, 우산은 챙겼다. 5시 3분, 버스가 도착하자 장우산을 든 형이 버스에서 내려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식당에 들어갔을 때는 우리..

첫 번째로 찾아왔던 장마는 생색만 슬쩍 내고 일찍 끝났다. 이윽고 극강의 더위가 찾아왔다. 이마와 등에 흐르는 땀방울 닦아내며 일찍 끝난 장마를 향해 툴툴거렸다. 장마는 매년 삼복 전후에 찾아와 한여름 열기를 식혀주는 고마운 빗물의 시간이었다. 그러니 별다른 역할도 없이 일찍 떠나버린 장마가 불만일 수밖에. 그런데, 내 툴툴거림을 들었던 것일까, 다시 찾아온 장마는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지 않은 느낌은 일종의 기시감인데, 이런 식으로 화풀이하듯 다시 찾아와 집중호우를 뿌리는 장마는 늘 물난리를 동반했다. 어제 그제 비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한여름 소나기라고 생각했는데, 예보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랫녘은 집중호우로 난리가 아니었다. 제방은 무너지고, 논과 밭, 집과 도로는 침수되고..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추적추적 내렸다. 우산 없이 집에서 전철역까지 걸어가도 옷을 적실만큼은 아니지만, 더러 펼쳐진 우산들이 보였다. 대개 나이 든 사람들은 우산을 썼고, 근처 문일여고 학생들은 우산을 접은 채로 들고 걸었다. 나도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눈 떴을 때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비는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다가 오후가 되면서 점차 갤 거라는 예보였다. 물론 오후에도 지역에 따라서는 약한 비가 간헐적으로 내릴 거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귀찮아서 우산을 두고 나온 게 아니라 예보를 믿은 거다. 어젯밤 술자리가 길어진 김 선배는 9시 30분쯤 전화해 점심 이후에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오전 출장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숙취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안다. 수화기 너머..

사실 비는 자주 왔다. 왔다기보다 노인네 오줌발처럼 질금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제법 비다운 비가 왔다. 아니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비다운 비라니, 그렇다면 비답지 않은 비도 있단 말인가? 대차게 내리든 질금거리며 내리든 빗방울 툭툭 떨구면 모두 비다. 다만 사람 중에도 다양한 외양, 다양한 성정이 있듯 비에도 다양한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도 각양각색이다. 소나기를 좋아하고 이슬비를 좋아하고 해 떴는데 내리는 여우비를 좋아하고 폭풍과 함께 내리는 폭풍우를 좋아하기도 한다. 나는 폭풍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세게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 난리만 나지 않는다면 사흘 낮 사흘 밤 비 내렸으면 좋겠다. 점심에 남부 마을교육지원센터에 나가 있는 후배 현이가 교육청을 찾아와 점심을 사 ..

60대 사내의 태만은 무모하다. 언제부터인가 상상력이 사라지고 나의 의식은 경화(硬化)되고 있다. 치열한 삶에 관한 경외도 없다. 말라가는 상상력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무기력이거나 무의미한 것에 관한 헛된 욕망이다. 어설프게 설계된 일상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라 그것의 위장된 속도감을 치열함이라고 합리화하며 하루하루 우민(愚民)으로 잘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척 자유로워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가, 나는 지금 짧게는 50분 전, 길게는 5일 전의 일조차 자주 까먹으면서 서슴없이 자유를 말하고 있다. 늘 이런 식이다. 내 인생의 대전발 0시 50분 기차는 이미 떠났지만, 기다리다 보면 기차는 다시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데, 언제나 착각은 자유이다. 그놈의 대전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