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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초여름의 환한 날들 (5-14-수, 잠깐 비 오고 갬) 본문

일상

초여름의 환한 날들 (5-14-수, 잠깐 비 오고 갬)

달빛사랑 2025. 5. 14. 23:31

 

오전에는 시장 가서 채소들을 샀다. 좋아하는 오이 가격이 많이 내렸더라. 사소하지만, 기뻤다. 누나가 사다 준 오이가 남았지만, 싸서 아무 생각 없이 한 봉지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요 며칠 후에 왔을 때 크게 올랐으면 서운할 것이다. 달걀 가격은 500이 올랐지만, 크기는 먼저 사 먹던 달걀보다 조금 커 보였다. 그렇다면 값이 오른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나처럼 질보다 양, 저렴한 가격에 목매는 사람은 달걀도 굵기보다 개수(個數)다. 개수가 같은데 가격이 비싸다면 오른 것이다. 희한한 가격 감각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희한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오후에는 점차 흐리더니 비가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비가 아닌 건 아니다. 비를 서운하게 할 생각은 없다. 문을 닫고 잠을 자면 땀이 난다. 기온이 그만큼 오른 것이다. 여름이 시작됐다는 말일 것이고. 내 고민은 깊어질 거야. 분명. 고작 계절의 바뀜이 이렇게 내가 잠자리에서 흘리는 땀 따위를 통해 감각되다니, 멋없다. 정말. 나는 확실히 여름에게 편견이 있거나 악감정이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따위’라는 부사격 조사를 별다른 죄책감 없이 여름에게 툭하면 붙이려 하지 않았을 거야.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모르겠다. 겪은 일의 전후도 자주 헷갈리고 굳게 한 다짐조차 쉬 깨버린다. 그렇게 쉬 깨진다면 굳게 한 게 아니겠지만, 사실 그 기억도 명료하지 않다. 그때 내가 다짐을 굳게 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짐은 대개 ‘굳게’ 하는 법이니 나도 그때는 분명 ‘굳게!’ 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여전히 확신은 없다.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나지 않는 건 이것뿐이 아니다. 이틀 전의 날씨도 헷갈린다. 건망증인가? 벌써? 우울하다. 지난겨울에서 이번 봄까지 내내 나는 우울했다. 내란을 겪었고, 최악의 인간들을 목격했으며, 최고 수치의 분노를 경험했다. 그러니 여름부터는 나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초여름의 환한 날들을 보고 싶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나? 없다. 나는 자주 비겁했다. 거짓말쟁이였다. 내 불안의 원인 상당 부분은 비겁함이나 거짓말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그 거짓말은 나의 영혼을 오랫동안 시나브로 병들게 했다. 가령 슬픔을 다스려야 하는 어떤 때는 오히려 슬픔을 과장했고, 슬퍼해야 할 때는 정작 센 척했다. 거짓말은 정서의 리듬을 깬다. 그런데 나는 했다’, ‘였다등의 과거형 어미를 사용했다.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여전히 거짓말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끔 참말과 거짓말의 경계에서 헷갈린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 나는 용감해지겠다라든가 나는 참말만 하고 살겠다라는 낯간지러운 다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다짐 만능주의자들은 대개 진정한 다짐을 희화화하곤 한다. 양치기 소년이 되기도 하고, ‘아큐정전의 아큐가 되기도 한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이처럼 쓸데없는 고민을 쓸모 있는 듯 윤색하거나 반성해야 할 걸 반성이 필요치 않은 걸로 꾸밀 수 있는 걸 보면 교활하기도 한 거 같아. 이것도 재주인가? 암튼 당분간은 계속 비겁할 예정이고 거짓말쟁이로도 살아갈 생각이다. 일관성은 있잖아? 병든 영혼이야 더 큰 거짓말과 비겁함으로 메꾸면 되지 뭐. 킥킥! 여름이 겁나긴 한 모양이네. 위악을 떠는 걸 보면……. 솔직히 말해 나도 사람인데, 왜 환한 초여름의 날들을 기대하지 않겠어?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름과 교묘한 심리 게임을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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