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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위장된 평화가 지배하는 시간 (2-16-일, 흐림) 본문

일상

위장된 평화가 지배하는 시간 (2-16-일, 흐림)

달빛사랑 2025. 2. 16. 23:24

 

난 행복한가? 음……, 물론 행복했지. 잠깐 ‘했지’라고? 이렇게 말하면 마치 지금은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들리잖아. 그건 사실이 아니야. 행복의 조건이 뭐냐에 따라서 대답은 달라지겠지만, 한 시절이 절대적으로 행복하거나 불행할 수는 없어. 과거가 행복했다면 지금보다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는 것과 사랑하는 엄마가 곁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사랑에 관한 대책 없는 열정이 그때는 있었다는 거야. 속맘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품고 상상하기만 해도 행복했던 시절이었으니까. 물론 돌아갈 수는 없지. 갑자기 쓸쓸해지네.

사실 나는 과거든 현재든 나를 둘러싼 상황과, 그 상황을 조성한 세상이 시비 걸지만 않으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을 거야. 근데 과거든 현재든 늘 세상과 사람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질 않는단 말이야. 과거에는 특정 상황(인물들)과 그 상황에 지배되는 세상이 시비 걸면 발끈 불안하고 화가 나서 나도 세상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 지금은 그저 넙치처럼 납작 엎드리거나 빈방에서 혼자 투덜댈 뿐이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 호전성(好戰性)이 좋았어. 화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이건 무슨 되지 않는 말인가 하겠지만, 투혼이 있다는 건 열정과 힘이 있다는 거고, 세상에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것이니까.

안타깝게도 아니 다행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세상보다는 나 자신에 집중하고 싶을 뿐이야. 그래서 행복해. 아니 ‘그래도’ 행복해. 지금은 과거처럼 가슴이 뛰는 순간이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연정을 품기도 하지. 가슴이 콩닥거릴 때는 시간을 거슬러 내가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복권을 확인할 때만 가슴이 콩닥거리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야. 그럴 때마다 내가 아직은 치명적으로 늙어버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

지금 나는 행복하고 평화로워. 하지만 이건 분명 위장된 평화, 이기적인 행복이야. 무관심과 무심함의 대가로 얻은 행복과 평화인 거지. 위장되고 이기적인 걸 알면서도 그 행복과 평화로움을 내 것으로 여기고, 느끼고, 누리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수치스러운 걸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건 파렴치한 일이지. 수치가 싫고 파렴치를 경멸해 그것들과 자주 주먹다짐했던 과거가 뿌듯하고 행복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이 평화로움(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가장된 평화라도 나는 누릴래. 적어도 이제는 싸우고 싶지 않아. 늙어버렸어. 혹시 마녀가 나를 찾는다면 평화로움을 위해 영혼을 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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