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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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곳에 가지 않았다 (9-23-토, 맑음)

달빛사랑 2023. 9. 23. 20:01

 

요즘에는 나에게 연락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최근 꾸준하게 전화해 주는 건 후배 은준과 H뿐이다. 물론 아는 선후배들이 전화해 안부를 묻거나 술 한잔하자고 할 때마다 “당분간은 금주하며 집에 있을래요” 하며 매번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혁재는 안부 전화를 가끔 할 줄 알았는데, 서너 달 동안 단 한 통의 전화도 없다. 나는 그의 안부를 다른 지인들을 통해서 듣고 있을 뿐이다. 소식에 의하면 여전히 술 마시며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부러운 주량이고 불가사의한 체력이다. 그래도 어디 아픈 데 없이 잘 지내고 있다니 매니저로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동안, 시 쓰는 한 후배는 출판 기념회를 했고 또 다른 후배는 시 낭송회를 했는데, 둘 다 나와는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이었지만, 그들도 나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내 쪽에서 원인을 제공한 것이지만 기분이 묘하다. 그런데 사실 더욱 우습게도 묘한 것은, 스스로 원한 의도적 고립의 결과를 ‘묘하다’라고 느낀 그 심리다. 편한 건 좋지만 잊히는 건 싫다고? 그건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암튼 묘하든 쓸쓸하든 당분간은 칩거 모드를 이어갈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은 인천아트플랫폼 지인들의 전시에도 가지 않았고, 부평풍물대축제에도 가지 않았다. 그 자리, 그 사람들의 색깔에 맞춰 어울릴 자신이 아직은 없다. 나는 나와 관련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중이다. 이를테면 술과 관련된 이미지가 나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토요일은 느긋하게 나를 망가뜨린다. 토요일의 수법을 잘 알면서도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잘 넘어가 준다. 요 며칠 사이 날씨가 참 청명해졌다. 전형적인 가을이다. 내가 기다려 왔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과 온도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곤 하는데, 이것 또한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이렇게 한가하게 느긋하게 무너져내릴 때면 뭔가 집중할 일거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일거리가 없으면 잠만 잔다) 고맙게도 화장실 조명이 나갔고, 샤워기 걸이가 떨어졌으며 문득 혈압계가 사고 싶어졌다. 당연히 그 세 가지 일을 모두 처리했다. 혈압계는 며칠 후에 도착할 것이다. 비교적 비싼 걸로 주문했다. 화장실의 조명이 밝아지니 다른 집에 온 것 같다. 아, 단백질 1kg도 구매했다. 오후에 후배의 새로 나온 시집을 검색했고 또 다른 후배의 전화를 받고 나서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어둑어둑해졌다. 해가 무척 짧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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