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청년예술가 자립지원 공모 심사 (9-21-목, 구름 낌) 본문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물론 몸과 맘은 속도가 다르다. 맘은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으나 돌아가는 길을 알면서도 그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몸을 발견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다만 몸이 맘보다 빠른 건 죽음 쪽을 향해 섰을 때뿐이다.
문화재단 공모 심의를 위해 동인천역 앞, 옛 인천여고 자리에 있는 청년문화창작소를 찾았다. 많은 심의를 했으나 청년 예술가들의 자립 지원 공모 심의는 처음이다. 지원서를 보니 대체로 아들 또래의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지원 동기와 사업 계획을 읽어 내려가다가 여러 번 울컥했다. 125명의 아들딸과 같은 젊은 예술가들의 앞날을 생각하며 꼼꼼하게 심의했다. 집에서 미리 살펴본 후 점수까지 기록해 가서 오늘 심의는 3시간 남짓 걸렸다. 부디 이 척박한 한국의 문화예술 상황에 기죽지 말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올곧게 펼쳐나가길 마음속으로 내내 응원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아래와 같은 심의 총평을 써서 제출했다.
❚심의 총평❚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도 예술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이번 인천문화재단의 ‘2023 청년창작활성화지원 자립지원 부문 추가 공모’에 지원한 모든 청년 예술가에게 감사와 응원의 인사를 드립니다.
미약하지만 이번 자립지원금이 여러분의 지속적인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솔직히 말해 작금의 고물가 고금리 시대에 100만 원이라는 적은 금액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이 돈은 현실적 지원금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응원의 마음이 담긴 상징적 지원금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원자 모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싶었던 게 심의위원들과 재단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능하면 모두 지원한다’라는 마음을 염두에 두고 심의에 임했다지만,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모의 성격상 심의과정에서의 탈락자 발생은 필연이겠지요. 이점은 무척 아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출하신 지원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느낀 점은 많은 지원자에게서 청년 예술가다운 창발적인 아이디어와 예술적 패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식적 수준의 진부한 기획도 없었던 건 아닙니다.(가수는 앨범 제작, 화가는 작품 제작, 연극배우는 공연 등) 어쩌면 장르 특성상, 그리고 막 시작하는 청년 예술가의 경험치를 볼 때 불가피했을 기획일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진취적이어야 하고 창의적인 작업이 필요한 게 청년 예술가만의 장점이 아닐는지요.
또한 이미 자립성을 충분히 확보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견 예술가들(물론 나이상으로는 지원이 가능한 청년의 범주에 들긴 하지만)도 많이 지원했더군요. 그들이라고 해서 어렵지 말라는 보장은 없겠으나, 더 어려운 신진예술가들에게 눈길이 많이 갔던 게 사실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술 창작행위라기보다는 상업행위로 보이는 기획을 보여준 사례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만큼 순수 예술가로서 살아가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겠지만, 이 공모의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아무쪼록 극히 적은 금액이지만, 이 지원금이 청년 예술가 여러분들에게 창작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고, 시민과 사회가 예술가를 기억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의미 있는 지원이 되길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주인공들입니다.
2023년 9월 21일
심의위원 문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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