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8-26-金, 맑음) 본문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하지만 나는 편지의 수신인을 특정하지 않은 채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하는 편지는 쓰고 싶진 않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아는 사람들이 수신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엄마와 아버지에게는 마음의 편지를 자주 쓰는 편입니다. 마음속에 연정을 품은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에게도 편지를 쓰겠지요. 옛날에는 우편엽서를 지니고 다니면서 카페나 공원, 교정의 잔디밭이나 숲 속, 휴게실에서 참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받는 사람은 어떤 느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편지를 쓸 때 나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음울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늘 납처럼 무거웠던 일상 속에서 편지 쓰기는 잠시나마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위로의 시간이었고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진한 그리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쓴 편지도 많지만 받은 편지도 많지요. 그 많은 편지를 지금까지 보관하지 못한 건 무척 아쉽습니다.
물론 편지를 가을에만 쓰는 건 아니겠지만 봄과 가을은 편지 쓰기 좋은 계절인 건 분명합니다. 상쾌한 바람과 적당한 볕이 자주 말을 걸어오고 기온도 적당해 공원이나 산책로 벤치에 앉아 책을 보거나 편지를 쓰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눈 내리는 겨울도 편지 쓰기 좋은 계절이지요.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거리가 보이는 카페의 창문 가에 앉으면 저절로 종이와 펜을 꺼내게 되곤 하지요. 간혹 부치지 못한 편지도 있었습니다. 짝사랑하는 대상에게 쓴 편지나 너무 일찍 하늘에 든 친구에게 쓴 편지는 부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그 편지들은 대부분 일기장에 옮겨 놓아 다행히 지금까지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다시 읽어도 마음이 먹먹해지곤 합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분명 안타까운 편지였을 텐데, 정작 내가 언제까지나 지니고 있을 수 있는 편지는 바로 그 안타깝고 마음 저리게 하는 편지뿐이라는 사실이 무척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이 가을에는 30통 정도의 편지를 써볼 생각입니다. 만년필의 잉크를 충분히 확보하고, 작은 수첩이나 엽서를 가방 속에 넣고 다녀야겠어요. 어느 날 문득 당신에게 나의 작은 엽서가 도착할지도 몰라요. 만약 제 편지를 만난다면 기쁜 마음으로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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