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나이팅게일과 장미」 | 오스카 와일드 본문
“그녀가 빨간 장미를 가져오면 나와 춤을 추겠다고 했어. 하지만 우리 집 정원에는 빨간 장미가 없는 걸.”
청년이 슬퍼하며 소리쳤어요. 그 소리에 떡갈나무 둥지 안에 있던 나이팅게일이 슬며시 나뭇잎 사이로 밖을 내다봤지요. 청년의 아름다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답니다.
“이렇게 작은 일 하나에 행복이 달려 있다니. 훌륭하다는 책을 모조리 읽어 보았지만, 빨간 장미 하나에 이렇게 고통스러워지는구나.”
나이팅게일이 말했어요.
“드디어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 이제야 그를 보게 되었구나. 그의 머리카락은 히아신스 꽃처럼 짙고 입술은 빨간 장미처럼 붉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걸…….”
그때 청년이 중얼거렸지요.
“내일 밤이면 왕자가 무도회를 열 거야. 사랑하는 나의 아가씨도 참석하겠지. 내가 그녀에게 빨간 장미를 선물한다면, 아가씨는 밤새도록 나와 춤을 춰 줄 거야. 내 품 안에서 내 어깨에 기대 나의 손을 꼭 잡아 줄 거라고.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빨간 장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녀는 날 외면할 거야. 내 마음은 외로움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겠지.”
청년은 풀밭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어요.
“왜 우는 거지?”
청년 곁을 지나던 작은 도마뱀이 말했지요.
“정말 그가 왜 울고 있는 거야?”
그의 곁을 날던 나비도, 활짝 피어 있던 꽃들도 물었어요.
“빨간 장미 때문이야.”
나이팅게일이 대답했지요.
“빨간 장미 때문이라고?”
모두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어요.
“어리석은 사람……. 쯧쯧.”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이팅게일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날개를 펼쳐 공중으로 날아올랐지요. 나이팅게일은 쏜살같이 숲을 지나, 어느 집 정원에 다다랐어요. 정원 한가운데에는 어여쁜 장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어요. 나이팅게일은 그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답니다.
“장미 나무님, 제게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주세요. 제가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하지만 장미 나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이런, 내 장미는 흰색이야.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처럼 희고, 산 위에 쌓인 눈처럼 하얀 장미 말이야. 오래된 해시계 근처에 사는 우리 형에게 가 보렴.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지 몰라.”
나이팅게일은 오래된 해시계 근처에 사는 장미 나무에게로 날아갔어요.
“장미 나무님, 제게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주세요. 제가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하지만 장미 나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요.
“내 장미는 노란색이란다. 인어의 머리카락처럼 노랗고, 초원에 핀 수선화처럼 노란 장미 말이야. 청년의 집 창가에 사는 우리 형에게 가 보렴.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지 몰라.”
다시 나이팅게일은 청년의 집 창가에 사는 장미 나무에게로 날아갔어요.
“장미 나무님, 제게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주세요. 제가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그러자 장미 나무가 대답했답니다.
“내 장미는 빨갛지. 비둘기의 두 발처럼. 바닷속의 산호보다도 붉어. 하지만 겨울이 오는 바람에 내 온몸은 꽁꽁 얼어버렸고, 꽃봉오리는 모두 떨어져 나갔단다. 게다가 폭풍우가 몰아쳐 나뭇가지마저 모두 부러져 버렸지. 그러니 올해는 꽃을 피울 수 없을 거야.”
나이팅게일이 애원했어요.
“전 빨간 장미 딱 한 송이만 있으면 돼요.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을까요?”
장미 나무가 대답했어요.
“흠,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하지만 너무 끔찍해서 내 입으로는 차마 말해 줄 수가 없구나.”
“제발 말해 주세요. 전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장미 나무가 마지못해 대답했어요.
“빨간 장미를 얻으려면, 네가 달빛 속에서 노래를 불러 스스로 장미꽃을 피워 내야 해. 그리고 네 심장의 피로 그 꽃을 붉게 물들여야 하지. 내 가시에 가슴을 대고 노래를 부르렴. 네가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면, 가시는 네 가슴속에 깊이 박힐 거다. 그러면 네 뜨거운 피가 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결국엔 내 피가 된단다.”
나이팅게일이 슬픔에 잠겨 소리쳤답니다.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얻기 위해 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요? 아, 하지만 사랑은 생명보다 소중하고, 새 한 마리의 심장은 사람의 심장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나이팅게일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어요. 그리고 쏜살같이 날아 청년이 있던 그 자리로 돌아왔지요. 그는 조금 전 그대로 쓰러져 울고 있었어요. 나이팅게일이 목청껏 소리쳤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곧 빨간 장미를 얻게 될 거예요. 내가 달빛 속에서 노래를 불러 장미꽃을 피워 내고, 내 심장의 피로 붉게 물들일 거예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뿐이랍니다.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 지혜롭고 강한 것이니까요.”
청년은 고개를 들어 귀를 기울였어요. 하지만 나이팅게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요. 그는 책에 쓰인 것 말고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떡갈나무만은 나이팅게일의 말을 알아듣고 슬퍼했어요. 그는 자신의 가지에 둥지를 틀었던 나이팅게일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지요. 떡갈나무가 나이팅게일을 향해 속삭였어요.
“내게 마지막 노래를 불러 주지 않을래? 네가 가 버리고 나면 나는 무척 외로울 거야.”
나이팅게일은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주었어요. 노래가 끝나자 청년을 일어서더니 주머니에서 공책과 연필을 꺼냈어요. 그리고 숲을 걸으며 중얼거렸지요.
“아가씨는 예의를 차릴 줄 알아. 그건 확실해. 하지만 그녀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사실 아가씨는 다른 예술가들과 다를 게 없어. 형식과 예의는 지킬 줄 알지만, 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도 결코 없을 거야. 머릿속에는 오직 음악뿐이지. 물론 아가씨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건 사실이야. 하지만 목소리가 아름다워 봤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잠시 뒤 청년은 자기 방 작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어요. 달이 하늘 높이 떠오르자, 나이팅게일은 장미 나무로 날아갔어요.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장미 가시에 갖다 댔지요. 나이팅게일은 밤이 새도록 가시에 가슴을 댄 채 노래를 불렀고, 달은 귀를 기울여 그 노래를 들었어요. 노래가 밤새 이어지는 동안 가시는 나이팅게일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답니다. 마침내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지요. 처음에 나이팅게일은 소년과 소녀의 마음속에 싹트는 사랑을 노래했어요. 그러자 장미 나무 맨 꼭대기의 가지에서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났지요. 노래가 하나둘 이어질 때마다 꽃잎도 하나둘 피어났어요. 맨 처음 피어난 꽃잎은 안개처럼 하얀색이었답니다. 장미 나무가 소리쳤어요.
“가슴을 좀 더 가시에 바짝 갖다 대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날이 밝기 전에 장미꽃을 다 피워 내지 못할 거야.”
나이팅게일은 가슴을 가시에 더욱 바짝 갖다 댔고, 노랫소리도 더 크게 했어요. 이제 노래는 젊은 남녀의 가슴속에 피어나는 열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자 부끄러워하는 신부의 볼처럼 장미 꽃잎에도 발그레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가시가 아직 나이팅게일의 심장에 박히지 않았기 때문에 꽃의 심장부는 여전히 흰색이었답니다. 나이팅게일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만이 꽃의 심장부를 붉게 물들일 수 있었으니까요. 장미 나무가 다시 한번 소리쳤어요.
“좀 더 가까이 오렴. 그러지 않으면 날이 밝기 전에 빨간 장미를 다 피워 내지 못할 거야.”
나이팅게일은 고통을 참고 가슴을 가시에 더욱 바짝 갖다 댔어요. 결국 가시가 나이팅게일의 심장을 찔렀지요. 타는 듯한 고통이 작은 새의 온몸으로 퍼져나갔어요. 고통이 더하면 할수록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더욱 격렬해졌답니다.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 무덤 속에서도 결코 시들지 않는 사랑을 노래했기 때문이에요. 마침내 장미는 진한 핏빛으로 물들었어요.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꽃잎도 심장부도 모두 붉은 색깔이었죠. 하지만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작은 두 날개는 힘없이 파닥이기 시작했어요. 두 눈 역시 빛을 읽어 갔지요. 그렇게 희미해져 가는 노랫소리와 함께 나이팅게일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답니다. 나이팅게일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한 곡을 토해냈어요. 그 노랫소리에 달은 날이 밝아오는 것도 잊은 채 하늘에 머물러 있었지요. 빨간 장미는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꽃잎을 활짝 피웠어요. 나이팅게일의 마지막 노랫소리는 메아리로 울려 퍼져 잠자고 있는 양치기들을 깨웠답니다. 노랫소리는 강가의 갈대숲을 지나 멀리 바다까지 퍼져나갔어요. 그때 장미 나무가 외쳤어요.
“이것 좀 봐! 이제야 빨간 장미를 피워 냈어.”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가슴에 가시가 박힌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풀밭에 누워 있을 뿐이었죠. 해가 뜨자 청년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어요. 그가 놀란 듯 외쳤지요.
“앗! 저건 빨간 장미잖아! 행운이 제 발로 찾아왔군. 이렇게 아름다운 장미는 처음 봐.”
그는 장미를 꺾어 들고, 부리나케 아가씨의 집으로 달려갔어요. 그녀는 문간에 앉아 푸른 명주실을 실패에 감고 있었지요. 발치에는 작은 개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어요. 청년이 기쁨에 들떠 소리쳤어요.
“아가씨, 빨간 장미를 가져오면 저와 춤을 추겠다고 말했죠?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 장미를 가져왔어요. 이 장미를 오늘 밤 아가씨의 왼쪽 가슴에 꽂으세요. 우리가 함께 춤을 추면 제가 아가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아가씨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대답했어요.
“그 꽃이 제 드레스에 어울릴지 모르겠군요. 궁정 고관의 조카는 제게 아주 값비싼 보석을 보냈답니다. 보석이 꽃보다 훨씬 값지다는 건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죠.”
청년이 실망하며 말했어요.
“세상에! 당신은 고마움을 털끝만큼도 모르는 사람이군요.”
화가 난 청년은 빨간 장미를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어요. 그 바람에 도랑에 빠진 빨간 장미를 마차 바퀴가 짓밟고 지나갔답니다. 아가씨가 소리쳤어요.
“고마움을 모르다니요! 당신이야말로 정말 무례한 사람이군요. 당신이 대체 뭐죠? 겨우 학생일 뿐이잖아요. 고관의 조카처럼 신발에 값비싼 은장식을 달 수도 없으면서!”
아가씨는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청년은 집으로 돌아가며 중얼거렸지요.
“사랑이란 정말 어리석은 짓이군.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 허구한 날 일어나지도 않을 일 타령뿐이지. 진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들어. 그래, 공부나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겠어.”
청년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답니다.
빨간 장미가 수레바퀴에 무참하게 짓밟혀버리고, 화려한 보석의 가치가 심장의 피보다 높이 평가되는 현실에 대한 대안이 고작 골방 철학으로의 회귀라니. 공허한 관념론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냉소가 신랄하군.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 때문에 노심초사 한 하루 (0) | 2020.12.20 |
---|---|
건강검진 (0) | 2020.12.19 |
심명수 시인의 <쇠유리새 구름을 요리하다> (0) | 2020.12.17 |
후배의 장편소설을 소개합니다 (0) | 2020.12.16 |
거절하기의 어려움 (0) | 2020.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