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햇살 투명한 일요일ㅣ막장 드라마에 대한 변명 본문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투명한 햇살과 맑은 하늘 때문에 소리지를 뻔했다. 이리 맑은 얼굴을 보이려고 며칠 전 가을은 몰래 밤비를 보내서 땅과 대기를 청소하게 했구나. 그래 이게 가을의 본 모습이지. 뿌리 근처로 돌아갈 잎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면서 가을은 또 한 번 깊어지겠지.
연휴 끄트머리 농담하나.... 한국 드라마의 '막장' 전개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요. 출생의 비밀은 단골 메뉴고 배다른 자매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된다거나 사랑 때문에 가족이나 가문을 배신하는 모티브들은 정말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음모로 인해 권력(명예나 부로 치환할 수도 있다)을 잃었으나 조력자의 도움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를 회복하는 모티브도 익숙하지요.
하지만 이런 막장 전개는 사실 한국의 드라마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의 내용 중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개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만 해도 그렇지요. 바빌론 왕인 느브카드네자르 2세의 딸인 아비가일레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공주였잖아요. 사실 그녀는 정비의 딸이 아니라 히브리 노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던 것이지요. 친딸인 페네나 역시 히브리 왕의 조카인 이스마엘레와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자매들은 이스마엘레라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연적 관계입니다. 한술 더 떠서 히브리인 이스마엘레는 적국의 공주를 사랑한 나머지 조국과 동포를 배반합니다. 이 얼마나 막장 전개입니까. 한국 드라마의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하지만 한국 드라마는 자국민들에게조차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는데 반해 베르디의 오페라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 오늘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오페라는 대본보다 음악적 요소가 더욱 강조된 예술 장르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가 막장 대본을 충분히 희석해 준 측면이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드라마나 영화, 특히 오페라와 같은 장르 종합 공연 예술의 경우, 대본의 힘보다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 노래, 음악과 같은 다양한 부면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는 예술이기 때문이겠지요.
애초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결국 한국 드라마가 막장이라는 불명예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개연성 없는 대본 탓도 있지만 대본 이외에 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부면의 극적 요소들이 함량 미달이거나 서로 화학적 시너지를 발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그것의 일차적 책임은 연출가에게 있는 것이고요. 아무튼, 예술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재밌고도 신비로운 정신의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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