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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그리움으로 가득한 가을밤, 빈소를 다녀오다 (9-25-日, 맑음) 본문

일상

그리움으로 가득한 가을밤, 빈소를 다녀오다 (9-25-日, 맑음)

달빛사랑 2022. 9. 25. 00:25

 

날이 너무 좋아서 자주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곳곳에 조각구름이 산개해 있었지만, 맑은 하늘과 청한 가을볕을 차마 가리지는 못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다녀왔다. 사흘 만에 들른 일요일 아침 센터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호젓했다. 운동을 마치고 나올 때쯤 되어서야 몸매가 다 드러난 꽉 붙는 운동복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운동복도 패션인 게 분명하다. 센터를 나와서는 복 권도 한 장 샀다. 자주 가는 미장원이 때마침 문을 열어 첫 손님으로 두발도 정리했다. 오전에 뭔가 많은 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함이 느껴졌다. 브런치로 시리얼을 먹었지만 두어 시쯤 허기가 느껴져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거실 화초인 접난 몇 포기를 분갈이 하고 잔 포기들은 모아서 물병에 꽂은 후 서재에 가져다 두었다. 내 방에 생명 하나가 더 들어온 셈이다. 괜스레 뿌듯했다. 얼마 전부터 천장 모서리에 다리가 길고 가는 유령 거미 한 마리가 살고 있는데, 그 녀석도 당분간 그곳에 살도록 허락할 생각이다. 

 

그리고 오후 4시쯤, 후배가 보낸 부고를 받았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후배 S의 모친이 운명하셨다는 부고였다. 얼마 전부터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는 S의 말을 틀을 터라서 부고가 갑작스럽거나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셨던 자애롭고 현명하신 그의 모친은 작년부터 치매를 앓아 오셨고, 서너 달 전에는 길 병원 중환자실에 내원하여 오래도록 치료를 받기도 했다. 고인은 명민한 아들의 영락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자 후배 S의 부친 역시 현재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박학다식하고 감수성도 예민한 S는 대학졸업 후 많은 일을 도모했지만 번번히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한때는 학원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오프라인 학원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그의 학원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후에는 주식에 손을 그나마 남은 재산마저 모두 잃었다. 서울대 출신 교사 아버지와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생활력이 강한 S는 보험일은 물론이고 잡지사 영업사원, 중국과의 무역업 등 재기를 위해 다양한 일을 했다. 현재는 한겨레 그룹 계열의 한 시사잡지사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생활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그런 아들의 처지를 보면서 부모님 역시 많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친부모는 아니지만 내가 그분들의 말년을 보면서 이렇듯 연민하게 되는 건 S에 대한 동병상련의 정서일 것이다. 

 

7시쯤 빈소에 도착했다. 빈소에는 S 혼자 앉아 있었고 접객실에는 가족들로 보이는 상복 차림의 무리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식사하고 있었다. 영정 사진을 올리는 액정 화면은 비어 있었다. 아직 영정 영상이 준비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들어가자 가족 중 한 사람이 누구의 지인으로 오셨느냐고 물었고, 그때 S가 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화꽃 한송이를 고인께 드리고 S를 꼭 안아주었다. 안은 채로 내가 "힘내!"라고 말하자 S는 "고마워요. 형이 처음으로 조문 와 준 사람이에요." 하며 울먹였다.

S의 어머니는 오후 1시 40분쯤 운명하신 것 같다고 했다. 점심때쯤,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부터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병원을 찾았는데, S가 도착했을 때는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잠시 지켜보다 돌아오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 안에서 다시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그대로 차를 돌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운명한 뒤였다고 한다. 간발의 차로 임종을 못 본 것이다. 물론 호흡이 남았을 때도 의식이 없어 사람을 알아보진 못하셨지만...... 

썰렁한 접객실에 앉아 상주가 따라주는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났고 9시쯤에는 거의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빈소는 조문객들로 가득 찼다. 세 명이나 되는 그의 여동생들도 인맥이 두텁고 S 역시 발이 넓어 조문객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 자리에는 성태 형과 은준이를 비롯한 후배들이 합석했고, 그들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 10시쯤 빈소를 나왔다. 상주인데도 S는 승강기 앞까지 따라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오늘처럼 주변 선후배들의 부고를 받을 때면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나와 함께 죽을 드시고 이튿날 새벽, 잠 자듯 하늘에 드신 엄마의 죽음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물론 운명하기 일주일 전부터 곡기를 몸에 들이지 못해 힘겨워하던 엄마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이나 처연하다. 엄마의 신비로운 죽음과는 별개로 나는 엄마에게 안 좋은 모습만 너무 많이 보인 것 같아 죄스럽기 그지없다. 아파하는 엄마의 모습에 공감하고 연민하기보다는 짜증을 부렸던 때도 자주 있었다. 그 짜증은 엄마의 몸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엄마를 수발해야 하는 내 일상의 불편함 때문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패륜도 그런 패륜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억이다. 다른 이의 빈소를 들를 때마다 엄마가 한없이 그리워지고 또 한편으로 너무도 큰 죄송스러움이 밀려오는 건 모두 그 때문이다. 집에서 주무시듯 운명한 울엄마의 죽음의 형식은 고령의 부모를 모시는 모든 지인들의 부러움이 되었다. 나의 패륜과는 무관하게 엄마는 자식인 나에게 전혀 부담을 남기지 않으시고 하늘에 드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인들은 호상이라느니, '네가 복이 많다.'라며 나를 부러워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미안함은 더욱 커진다.


엄마, 다시 또 한 분의 영혼과 이별하고 돌아온 오늘, 생전에 자주 하지 못한 말, 바보처럼 이제서야 해봅니다. "엄마, 정말 고마웠어요. 엄마가 내 엄마였다는 건 정말 행운이에요. 엄마의 기도의 힘으로 오늘도 나는 무탈하고 살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엄마의 아들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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