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자발적 고독의 필요성 (9-23-金, 흐리고 비 내리다 갬) 본문
나의 고독을 방해하는 이들은 나와 가장 친한 이들이다. 오후 2시쯤 후배 장(張)의 연락을 받았다. 내가 자주 가는 술집 근처에서 볼일이 있으니 시간 되면 보자는 것이었다. 피곤했다. 그의 전화가 피곤했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전날, 교육감과의 만찬에서도 술을 마셨고, 화요일에도 혁재, 윤 대표 더불어 술을 마셔서 오늘은 정말 쉬고 싶었다. 전화를 받으며 “글쎄, 시간을 봐야겠어. 나중에 연락할게”라고 대답한 이유도 술자리가 썩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결정 장애를 앓는 나는 전화를 끊으면서도 분명 후배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보고 싶다며 연락해 온 사람의 제안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어’라는, 선택 장애 환자인 나의 이 대책 없는 배려의 마음, 글쎄 이 마음이 ‘배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늘 그래 왔다. 결국 퇴근 후에 나는 갈매기 쪽으로 걸어가며 후배에게 전화해 “도착했니?” 물었고, “예, 저는 조금 전에 도착했으니 천천히 오세요” 후배가 대답했다. 5시 30분쯤 갈매기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손님이 제법 있었다. 후배와 막걸리 두 병만 마시고 8시 이전에 귀가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뜻밖의 변수가 생길 줄이야.
후배와 막걸리 한 잔을 마셨을 때, 고등학교 동창인 김과 이가 내 이름을 크게 외치며 들어온 것이다. “그래, 여기 오면 너 볼 수 있을 거 같더라고.” 하며 들어온 그들은 합석을 권유했고 나는 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그 자리에 앉아서 잔을 받았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후배 장과 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문이었다. 결국 장까지 합류해 4명이 함께 술을 마셨다. 친구 이와 후배 장이 동문의 안부를 서로 확인하고 족보를 따지면서 의기투합해 술자리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인천이 좁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간단히 마시고 일찍 귀가하려 한 내 의지와는 달리 술자리는 당연하게 길어졌다. 반갑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묘한 감정 상태가 되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제법 많은 술을 마셨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는 고등학생 수준으로 가벼워졌고, 이와 장은 아예 모로 돌아앉아 둘만의 이야기에 분주했기 때문에 친구 이와 나는 의례적인 안부만 확인하며 말없이 술만 마셨다. 8시가 채 못 되어 일어난 우리는 근처 경희네로 자리를 옮겨 2차를 했다. 그곳에서도 2:2 대화 모드는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점점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아서 나 먼저 가겠다고 하고 술집을 나왔다. 나오다 보니 담배 피우러 나갔던 친구 이는 호프집 앞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차를 타러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취기가 좀 가셨다.
오늘부터 금주하고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보려 했는데, 본의 아니게 계획이 깨져버렸다. 소심한 성격의 나에게는 고독한 시간을 갖는 일조차 쉽지 않다. 배려도 좋지만 내 몸 생각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영양가 없는 온갖 종류의 소음에서 벗어나 나를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게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물론 반갑기는 했지만, 후배는 왜 하필이면 내가 고독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연락했단 말인지. 동창들은 많고 많은 술집 중에 하필이면 갈매기로 찾아와서 술자리를 길게 만들었을꼬. 허허, 참. 그나마 가을밤에 만난 상쾌한 바람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주 우울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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