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혁재, 엄마방에서 자다 본문
집에서 쉬고 있는데 후배 병균이가 연락했다. 정말 외출하기 싫었지만, 병균이 본 지 너무 오래돼 피곤함을 무릅쓰고 만나기로 했다. 민예총으로 발송된 문동만 시인의 산문집을 전해 받고 갈매기에 갔더니 병균이와 Y가 앉아 있었다. 7시쯤 되었을 때 혁재도 합류했다. 병균이는 실연의 상처를 어느 정도 극복한 듯 보였다. Y는 제물포에 있는 예술공작소 공간을 전세로 내놓고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몰랐던 일인데, 녀석은 불미스러운 일에 엮여 재판 중이었다. 6가지 내용으로 고소 고발당했다고 하는데 우습게도(?) 그 고발 주체가 전에 사귀던 애인이라고 했다. 남녀 관계를 어떻게 풀었기에 전 애인으로부터 그런 무지막지한 고발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병균이는 “자업자득이지 뭐.”라고 말했지만, 참 딱한 생각이 들었다. 녀석의 행태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늘 조마조마하긴 했다. 그래도 자신만만하게 미래를 낙관하는 Y를 보며 ‘이렇게 속 편하게 사는 녀석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전 같으면 입바른 소리를 해댔겠지만, 내 삶 하나도 건사하기 피곤한데 남의 삶까지 참견하는 건 감정 소모라는 생각에 듣고만 있었다.
갈매기를 나와 병균이는 택시를 잡아타고 자기 집으로 가고 나와 혁재는 함께 우리집으로 왔다. 집 앞 슈퍼에서 막걸리 다섯 병을 사 왔는데, 한 병을 남기고 모두 마셨다. 별로 취하질 않았다. 혁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형, 이 집 기운이 좋네. 웃풍도 없고 따듯하고 구조도 잘 나왔네. 여기서 계속 사세요. 형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집이야.”라며 풍수 전문가처럼 말했다. 출근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해서 어머니 방에 혁재의 잠자리를 봐주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혁재는 남은 막걸리 한 병과 컵 하나를 챙겨 들고 어머니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