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존재에 대한 자신만의 사랑법 혹은 함께 지나온 시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 본문
존재에 대한 자신만의 사랑법 혹은 함께 지나온 시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
-김정렬 형의 초상화에 대하여
문계봉(시인)
얼굴에 드러난 표정과 주름, 그것은 존재와 존재를 구별시켜주는 각각의 역사이자 삶의 흔적입니다. 모든 존재들은 얼굴의 표정과 주름으로써 자신의 삶과 이력(履歷)을 웅변하며 얼굴을 통해 다른 존재와 자신의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실천의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치열한 활동가이고, 지인들이나 제자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는 무척이나 유쾌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쉴 새 없이 방출하는 작가 김정렬 형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 그 표정과 주름에 주목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온 얼굴을 통해 해당 인물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 속에서 펼쳐졌던 신산함과 치열함, 성취와 자부를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렬 형에게 있어 초상화는 모델이 된 인물들과 그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가장 자기다운 사랑의 표현법이자 함께 지나온 시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고 헌정이었을 게 분명합니다.
작가 김정렬 형은 오랜 세월을 두고 모델의 삶, 혹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들의 표정을 포착하기 위해 숨을 죽여 왔을 겁니다. 퇴근 이후 늦은 밤, 은은한 빛을 창가에 뿌리며 서성이는 달(月)의 추파를 의식하며, 혹은 내리는 빗물이 만들어내는 고즈넉한 한 밤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또 가끔은 직장인들이 미처 출근하기 전 거리에서는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일찍 둥지를 나선 새들의 날갯짓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는 그 묵시적 시간 속에서 화폭을 마주한 채 모델의 표정과 주름을 그려가며 주변 사물들의 뒤척임과 한숨과 기지개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합니다. 희미한 자연광이 작업실까지 틈입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혹은 그의 붓끝이 사람들의 표정과 주름의 이력을 포착하기 위해 숨죽이는 시간 동안 그는 문득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얼굴, 그것이 지닌 표정과 주름은 바로 그 주인들의 인생과 닮았다는 것을. 하여 그는 지인들의 얼굴을 화폭 속에 담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 또한 화폭 속으로 불러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인간의 삶이든 자연의 삶이든 기다림은 언제나 각각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는 행위는 기다림 그 자체이자 기다림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또 다른 길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작가의 이 작업은 무척이나 무모하고 고생스럽게 느껴졌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공감각적으로 만나려는 그의 시도를 당분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업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그의 생각, 다시 말해서 그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업을 마친 후 팔레트를 닫고 붓을 빨아 널어놓으며 그는 각각의 얼굴들이 주름과 표정으로 풀어낸 수많은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복기(復記)하느라 격한 가슴을 억누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화폭 속에 담긴 다양한 얼굴들은 단순히 그려진 그림으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작가의 삶속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안고 성큼! 걸어 들어온, 살아있는 존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 경이롭고 낯선 경험을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당신도 경험해 보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겠지만 그러나 작가는 그것을 설명할 의도도 방법도 없어 보입니다. 왜냐 하면 작가는 다만 당신에게 그 극적인 이력의 주인공들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얼굴들이 펼쳐 보이는 다양한 표정들에 담긴, 때로 은밀하고 때로 애틋하고 또 때로 장엄한 사연들을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당신과 나의 몫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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